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불화 – <감로도>:윤예지

<감로도>, 조선 1649년, 220x235cm, 신수2743

<감로도>, 조선 1649년, 220x235cm, 신수2743

이 불화는 <감로도(甘露圖)>, 달콤한 이슬이 내리는 장면을 그린 그림입니다. 그림을 한번 바라보세요.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조금은 혼란스러우실 것 같습니다. 사람들, 신선, 관료, 아귀, 부처, 음식이 차려진 상까지 화면에는 수많은 요소가 펼쳐져 있으니 말입니다. 이들의 모습은 ‘달콤한 이슬’이라는 이름과는 썩 어울리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감로’란 굶주린 영혼을 달래는 법식(法食), 즉 부처의 자비와 가르침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감로도>는 ‘수륙재(水陸齋)’라는 불교 의례와 관련이 있으며, 영혼에게 음식을 보시하는 시식(施食) 의례에 두루 사용한 도상입니다. 수륙재는 제사를 지내줄 사람이 없는 무주고혼(無主孤魂)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아귀(餓鬼) 등 모든 존재에게 구원의 감로를 베푸는 의식입니다. 따라서 <감로도>는 고통받는 모든 영혼에게 의례를 통해 타는 목마름을 달래줄 달콤한 이슬을 베푸는 그림입니다. <감로도>에 담겨 있는 이야기를 따라가며 영혼을 위로하는 감로와 그 속에 담긴 옛사람의 따뜻한 마음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감로도> ‘화기(畵記)’

<감로도> ‘화기(畵記)’


이제 그림을 살펴보겠습니다. 가장 아래에 빨간 사각형의 ‘화기란’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불사에 참여한 승려, 시주자, 불화를 봉안한 사찰 등 그림에 대한 중요한 정보가 적혀 있습니다. 조금 훼손되긴 했지만, 이 화기를 통해 <감로도>가 1649년 그려져 금산의 보석사(寶石寺)라는 사찰에 모셔진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감로도> 하단

<감로도> 하단

상단, 중단, 하단으로 나누어 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림 하단에는 허망한 죽음을 맞닥뜨린 사람들을 그렸습니다. 이들은 고통 속에서 구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서로 싸우는 사람들, 목이 베인 장군, 칼을 쓴 죄인, 호랑이에게 공격당하는 사람, 불길에 휩싸이고 무너진 건물에 깔린 사람들이 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안온히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고, 끔찍한 재난을 만나 원통히 죽은 영혼들입니다. 사람들은 풀지 못한 이들의 한이 사회에 전염병 같은 재난을 불러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감로도> ‘전쟁 장면’

<감로도> ‘전쟁 장면’

특히 <감로도> 하단에는 조총 등 무기를 들고 싸우는 군사들의 모습이 큰 비중으로 그려졌습니다. 이는 <감로도>가 그려진 1649년 당시, 사람들의 뇌리에 생생히 남아 있던 전쟁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과 1637년 병자호란 등을 겪으며 당대를 살아간 사람들은 끔찍하고 한스러운 죽음을 수도 없이 목격해야만 했습니다. 특히 보석사가 있던 금산은 임진왜란 당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 곳이었습니다. 고경명, 조헌, 영규가 이끄는 의병이 외적의 침입에 대항했으나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전사했습니다. 이들의 희생에 대한 기억과 추모의 마음을 담아 <감로도> 하단에 전쟁으로 사망한 영혼들을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감로도> 중단

<감로도> 중단


시선을 조금 올려 그림의 중간 부분인 중단을 살펴봅시다. 중단에서는 하단의 영혼들을 위해 성대한 야외 의식을 올리고 있습니다. 선왕과 선후, 관료, 신선 등이 초청되어 자리에 함께했습니다. 흰옷을 입은 재주(齋主)는 마음을 담아 절을 올리고, 승려들은 각자 맡은 역할에 따라 의식을 이끕니다. 상 위에는 향, 촛불, 꽃, 각종 과일, 쌀 등이 정성스럽게 차려졌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이는 진짜 공양물이 아니라 걸개그림임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전쟁 이후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던 17세기의 상황을 고려하면, 매번 큰 비용을 들여 상을 차리는 대신 공양물을 그린 그림을 걸어 형편에 맞게 정성을 다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공양물을 그린 그림 앞에서 승려들은 경전을 읽고,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인 범패(梵唄)를 하고, 의식을 집전하며 아귀와 고혼들이 감로로 두루 목을 축일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감로도> ‘아귀’

<감로도> ‘아귀’


승려들의 옆에는 커다란 몸집의 두 아귀가 있습니다. 배는 태산처럼 큰데 목구멍은 바늘처럼 가늘어 영원히 배고픔과 목마름에 시달리는 안쓰러운 존재입니다. 무언가 먹으려 해도 곧장 음식이 불길로 바뀌어 허기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아귀의 목을 적셔주는 것은 영혼을 구원하는 감로뿐입니다. <감로도>에서 이들은 구원의 대상을 대표하는 존재입니다. 중단의 두 아귀는 수륙재의 기원을 다룬 설화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유가집요구아난다라니염구궤의경(瑜伽集要救阿難陀羅尼焰口軌儀經)』 등의 경전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부처의 제자인 아난(阿難)은 길을 가다 ‘염구(焰口)’라는 아귀를 만나, 3일 뒤 자신이 죽어 아귀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끔찍한 예언을 듣지요. 아난은 이를 피하고자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을 받아 아귀와 고혼을 구제하는 재를 올리기 시작합니다. 결국 이 아귀는 구제를 받는 대상임과 동시에, 구제를 가능하게 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비로 영혼을 구원하는 보살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감로도> 세부(상단)

<감로도> 세부(상단)

이렇게 정성 들여 재를 올리면 드디어 여러 부처와 보살이 강림합니다. 그림 상단에는 정성 들인 기도에 응하여 고통받는 영혼들에게 감로를 내려주는 불보살을 그렸습니다. 상단 가운데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일곱 부처가 있습니다. 이들은 가피력(加被力)으로 공양물을 감로로 바꾸어 베풉니다. 그 양옆으로는 아미타불을 좌우에서 모시는 관음보살(觀音菩薩),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있습니다. 걸개그림 왼쪽에 번(幡)을 들고 서 있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은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하고 의식의 효험을 증명합니다. 인로왕보살의 발치에는 대좌와 그 위에 놓인 연꽃이 보이는데요, 이는 영혼을 극락정토로 인도하는 탈것인 벽련대반(碧蓮臺畔)입니다. 중단에서 인간이 정성껏 올린 의례의 공양은 상단에 있는 부처와 보살의 자비심으로 아귀와 고혼 모두를 구제할 ‘단 이슬’로 바뀌어 하단의 영혼들을 적셔줍니다. 이처럼 <감로도>에는 아래로부터 위로 향하는 간절한 기도, 이에 응하여 다시 아래로 흐르는 구원의 서사가 담겨 있습니다.

<감로도>가 그려진 17세기 중엽 조선 사회를 상상해봅니다. 수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남겨진 사람들은 그 죽음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을 겁니다. 이들은 전쟁으로 파괴되고 가족과 친구가 죽어간 땅 위에서 삶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7세기는 세계적으로 이상저온 현상이 나타났던 소빙하기였습니다. 폭설과 가뭄 등 자연재해가 연이어 조선을 덮쳤고 수많은 사람이 굶주림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고단한 생활을 이어가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감로도>를 만들었고, 억울하게 죽은 영혼을 위한 재를 올렸습니다. 여기에는 한스럽게 죽은 영혼들이 고통에 타들어가던 목을 적시고 극락에서 편히 쉬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었습니다. 이는 망자를 위로하는 일임과 동시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사회가 최근 겪었던 재난들을 떠올려본다면 그 마음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이제 한 걸음을 뒤로 물러나 다시 한번 <감로도>를 바라보시기를 권합니다. 어떻게 느껴지시나요? 복잡하고 낯설어 보이던 불화가 건네는 따뜻한 위로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으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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