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곡식 담는 그릇 – 궤(簋, Gui):오세은

‘궤[簋, Gui]’라고 하는 이 청동 그릇은 피[稷], 기장[黍], 쌀[稻], 수수[粱] 등으로 만든 음식을 담아 제사를 지내는 데 사용한 중국의 예기(禮器)입니다. 아가리가 밖으로 살짝 벌어진 불룩한 몸통을 굽다리가 받치고 있는 형태입니다. 목 부분의 넓은 띠에는 동물 머리를 중심으로 좌우로 연속해서 새무늬를 장식했습니다. 띠 아래에는 세로 줄무늬가 고르게 있어 그릇이 풍만해 보입니다. 굽다리에는 세로로 돌출선이 있고 이 선을 중심으로 역시 새무늬가 좌우 대칭으로 있습니다. 새무늬는 모두 머리에 깃이 있고 꼬리가 긴 형태인데 이후에 봉황무늬로 발전합니다. 몸통 양쪽에는 동물 얼굴이 장식된 손잡이가 세로로 달려 있습니다. 손잡이 아래에 귓불처럼 작은 갈고리 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는데 이를 ‘수(垂)’라고 합니다. 이렇게 동물 모양 손잡이와 굽다리가 있는 궤는 상(商)나라 후기(기원전 13세기~기원전11세기) 때 유행했습니다. 그릇 안쪽에는 “추부정(醜父丁)” 이라는 금문(金文, 청동기에 새겨진 글자)을 새겼습니다.

추부정궤, 중국 상(商) 후기, 높이 14.3cm, 입지름 19.1cm, 바닥지름 15.60cm, 구3377 추부정궤, 중국 상(商) 후기, 높이 14.3cm, 입지름 19.1cm, 바닥지름 15.60cm, 구3377

추부정궤 내부 추부정궤 내부

궤의 등장과 기형의 변화

중국에서는 신석기시대 량주문화[良渚文化] 때부터 흙으로 궤를 만들어 곡식을 담는데 사용했습니다. 이후 기원전 16세기 상대 초기부터 청동으로 궤를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넓은 아가리와 좁은 바닥, 손잡이가 없는 형태로 토제 궤와 모양이 비슷했고 상대 중기 이후 손잡이가 생겼습니다. 서주(西周, 기원전 1046년~기원전771년) 초기부터 예기로서 위용을 드높이기 위해 굽다리 아래에 사각 받침대를 붙였고, 서주 중기 이후에는 위생 등을 고려하여 뚜껑을 덮었습니다. 서주 후기에 3개의 짧은 다리로 굽다리를 받치는 새로운 형태가 등장했고 전국시대(戰國時代)까지 이어졌습니다.

권력의 상징 - 열정제도(列鼎制度)

궤는 정(鼎, 고기 삶는 세발솥)과 함께 중국 고대 신분을 나타내는 중요한 예기였습니다. 서주시대부터 신분에 맞게 정과 궤를 사용했는데 이를 ‘열정제도’라고 합니다. 『예기(禮記)』 등의 문헌에는 정과 궤를 조합하여 천자(天子)는 9정 8궤, 제후(諸侯)는 7정 6궤, 경대부(卿大夫)는 5정 4궤, 원사(元士)는 3정 2궤를 사용해야 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춘추(春秋) 중기이후 제후국들이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규정을 넘어선 수량의 정과 궤를 사용했다는 사실이 제후 무덤의 발굴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한자의 기원 – 금문(金文)

중국 고대 청동기에 새겨진 글자를 ‘금문’이라고 하는데, 청동 예기에 새겨졌으므로 ‘종정문(鍾鼎文)’ 또는 ‘이기명문(彝器銘文)’이라고도 합니다. 또한 청동을 ‘길금(吉金)’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길금문자(吉金文字)’라고도 합니다.
금문은 상대 중기에 처음 보이기 시작합니다. 초기에는 부족을 상징하는 족휘(族徽)나 기일(忌日) 한두 자를 간단히 조합하여 금문으로 새겼습니다. 글자 크기와 선 굵기가 각각 다르고 문자보다는 부호에 가까워 초기의 금문은 의미를 알기 어려운 글자가 많습니다. 상대 후기부터는 글자 수가 점점 늘어나고 현대 한자와 비슷한 형태로 발전하여 그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글자가 많아졌습니다. 서주시대에는 긴 문장의 금문을 청동기에 기록했는데 이는 진한대(秦漢代)에 문자 통일과 한자를 완성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금문의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가족이나 씨족의 성씨입니다. 두 번째는 가족 구성원이 사망한 날로, 성씨와 조부모 또는 부모의 사망일에 해당하는 십간(十干)을 조합하여 새겼습니다. 이 청동 궤에 새겨진 추부정이 대표적인데, ‘추’는 그릇 주인의 성씨이고, ‘부정’은 아버지가 정일(丁日)에 사망했음을 뜻합니다. 이 궤는 황실이나 귀족 집안에서 제사를 올릴 때 사용하던 제기인데, 글자 크기와 선 굵기가 각각 다른 것은 상대 금문의 특징입니다.
세 번째는 그릇을 만든 사람의 이름이나 그릇 주인의 성씨를 새긴 것입니다.
전국시대 이후 밀랍을 이용한 제작 방법인 실랍법(失蠟法, 또는 탈랍법)으로 청동기를 만들면서 금문 형태와 새기는 방식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전국시대 이전에는 도기 거푸집을 이용하는 도범법(陶范法, 또는 분주법)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청동기를 제작할 때 금문을 함께 새겨 넣어 글자의 파임이 깊고 크기가 각각 다른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실랍법으로 청동기를 만들면 완성한 뒤에 금문을 새겨 넣기 때문에 파임이 비교적 얕고 글자 배치와 크기를 일정한 것이 많습니다. 상대 후기에 만들어진 이 추부정궤 역시 금문이 새겨진 형식과 서체 등으로 청동기의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추부정궤 금문 ‘추부정(醜父丁)’

추부정궤 금문 ‘추부정(醜父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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