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 상감 연꽃 넝쿨무늬 대접, 조선 15세기, 높이 7.6cm, 입지름 17.5cm, 1981년 이홍근 기증, 동원887
상앗빛을 띠는 이 백자 대접은 입술이 밖으로 살짝 벌어지고 몸체의 옆면은 완만한 곡선을 그립니다. 대접 바깥 면에는 검은색의 가는 선으로 연꽃과 넝쿨무늬[蓮唐草文]를 빙 둘러 장식했습니다. 대체로 만듦새와 다듬새가 좋고 굽 깎음도 단정하며, 형태와 장식 문양에서 매우 세련된 품격을 보여주는 대접입니다.
이 대접은 중국 원(元)·명(明) 백자의 영향을 받은 경질(硬質) 백자와는 달리 고려백자의 흐름을 잇는 조선 초기 연질(軟質) 백자의 전형적인 사례로서, 상감(象嵌) 기법으로 문양을 장식한 조선시대 상감백자(象嵌白磁)입니다.
백자 대접, 조선 15세기, 높이 11.7cm, 입지름 24.9cm, 신수5046
청자의 시대였던 고려를 지나 조선시대가 되면 바야흐로 도자기는 청자에서 백자로 그 중심이 옮겨갑니다. 유교를 내세웠던 조선은 왕의 그릇으로 백자를 택하였고, 유교 이념과 순백의 백자는 너무나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순백자 외에도 상감백자, 청화백자(靑畵白磁), 철화백자(鐵畵白磁), 동화백자(銅畵白磁) 등 다양한 백자를 만들었습니다. 이 가운데 상감백자는 고려시대 상감 기법 전통을 이어받은 백자입니다.
이 연꽃 넝쿨무늬 대접이 만들어진 조선 초기에는 고려청자를 계승한 조선 분청사기가 전국에서 다양한 양식으로 제작되었고, 조선백자도 아주 제한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여러 기록과 발굴 자료를 통해 중국 원·명대의 청화백자가 조선 왕실에 전해져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 청화백자는 고려 말에 들어온 것으로 보이지만, 중국 황실 어기(御器)인 청화백자가 전해진 확실한 기록은 세종 10년(1428)에 명 선덕제(宣德帝)가 청화백자를 보냈다는 내용입니다. 세종 12년(1430)에도 명 사신이 다른 하사품과 함께 청화백자를 전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밖에 명 사신이 개인적으로 청화백자를 가지고 오거나 우리나라 사신이 들여온 양도 많았을 것입니다. 또한 중국에서 들어온 것 외에 일본, 류큐[琉毬, 지금의 오키나와]에서 진상한 청화백자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조선시대 상감백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조선 상감백자의 백미
대접 바깥 면에 마치 세필(細筆)로 정묘하게 그림을 그리듯 검은색의 가는 상감선으로 연꽃과 넝쿨무늬를 표현했는데, 부드러운 석고질의 백자 바탕과 어우러져 고아한 자태를 보여줍니다. 입술 부분의 안쪽 면에는 잘 정돈된 넝쿨무늬를 군더더기 없이 표현했는데, 바깥 면의 연꽃 넝쿨무늬와 함께 그 표현이 매우 간결하고 섬세합니다. 이렇듯 조선 초기 백자의 높은 격조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이 작품은 조선 상감백자의 백미(白眉)라 할 만합니다.
백자 상감 연꽃 넝쿨무늬 대접의 연꽃 넝쿨무늬
백자 상감 연꽃 넝쿨무늬 대접의 굽 부분
이처럼 단정한 도자기 형태에 잘 어울리도록 간결하게 표현한 연꽃 넝쿨무늬는 같은 시기 중국 청화백자의 문양과 유사하여 특히 눈길을 끕니다. 몸체 표면에 두 겹의 선을 위아래에 그려 문양을 장식할 공간을 마련한 뒤 흑상감으로 연꽃 넝쿨무늬를 표현했습니다. 연꽃은 예로부터 도자기에 자주 등장하던 문양 소재인데 이 대접에는 넝쿨과 함께 위아래를 향하는 네 개의 연꽃을 번갈아 배치했습니다. 이는 중국 원·명대 청화백자 대접의 바깥면 상단부에 청화로 그린 문양과 매우 유사하여 중국 도자의 영향을 뚜렷이 알 수 있습니다.
청화백자 대접, 중국 명, 개인 소장
전통과 외래의 조화
다만 차이가 있다면 중국 청화백자는 꽃과 잎의 윤곽선을 그리고 붓으로 그 안을 청화로 채워 장식했지만, 조선 상감백자는 연꽃과 잎의 윤곽선만을 흑상감 기법으로 표현했습니다. 따라서 상감백자는 청화 안료인 회회청(回回靑)으로 백자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본격화되기 전에 전통적인 상감 기법으로 중국 양식을 표현하면서 시문하면서 등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백자 상감 연꽃 넝쿨무늬 대접의 문양
중국 청화백자 대접의 문양
다른 상감백자 대접에서도 이러한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검은색 상감선으로 꽃잎의 윤곽선을 그리고 꽃과 잎을 면으로 상감하면서 실제 연꽃에서 보이듯 꽃잎 끝을 강조하여 묘사한 작품도 있습니다. 이러한 부분 면상감 기법은 음각으로 표현한 문양에 흙을 채워 넣기보다 면을 칠하는 형태여서 전통적인 상감 기법과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아마도 중국 청화백자 같은 새로운 도자를 접한 장인이 그것을 표현하고자 전통적인 방법에서 출발한 뒤 다시 번안하여 묘사한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백자 상감 대접, 조선 15세기, 높이 8.3cm, 입지름 16.0cm,
2021년 이건희 기증, 건희1791
연꽃 사진 ⓒ두피디아
백자 상감 대접, 조선 15세기, 높이 8.5cm, 입지름 16.5cm, 1981년 이홍근 기증, 동원95
한편, 대접의 안쪽 면에는 입술 가까이에 가로줄과 넝쿨무늬[唐草文]로 이루어진 문양대를 돌렸을 뿐 나머지 다른 장식은 없습니다. 이 넝쿨무늬는 고려청자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 상감·인화 분청사기에도 자주 등장하는 문양 요소인데, 이 상감백자 대접에서 그 흐름을 잇고 있습니다.
백자 상감 연꽃 넝쿨무늬 대접의 넝쿨무늬
‘장흥고(長興庫)’가 새겨진 분청사기 인화무늬 대접, 조선 15세기, 높이 7.0cm, 입지름 19.7cm, 덕수6369
이처럼 백자 상감 연꽃 넝쿨무늬 대접에 표현된 문양과 장식 기법은 조선 초기 백자 제작에서 전통 요소와 외래 요소가 어떻게 적용되고 서로 조화를 이루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조선 15세기는 고려 도자의 맥을 이어나가는 한편, 새로운 중국 도자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매우 한국적인 도자 양식을 이룩해가는 복잡하고도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이 백자 상감 연꽃 넝쿨무늬 대접은 전통과 외래의 조화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독창적인 문양이 많이 표현된 상감백자는 조선시대에 청화백자가 제대로 만들어지기 전에 조선백자의 한 종류로서 자리매김 해나간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