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다카무라 고운(高村光雲)의 기예천(技藝天) : 류승진

일본 근대조각의 거장 다카무라 고운(高村光雲, 1852~1934)이 만년에 제작한 불교조각 <기예천(技藝天)>입니다.

기예천

<기예천>, 다카무라 고운, 일본, 1920년대 후반 이후(쇼와昭和 초기), 나무, 높이 27.1cm, 근대128

아마도 앞선 소개는 이 작품의 이해를 돕기보다 오히려 더 많은 궁금증만 불러일으킬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본 근대조각의 거장이라는 다카무라 고운은 대체 누구이며 기예천은 또 무엇인지, 작가와 주제 모두 우리에게 생소하기만 합니다. 게다가 일본의 근대조각이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는 사실은 조금 놀랍기까지 합니다. 이 상은 높이 27.1cm에 불과한 소품이지만, 그 안에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쳐 활동한 일본 미술계 주요 인물들의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또한 국립중앙박물관의 아시아 미술 수집 역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장면에 등장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작가인 다카무라 고운은 1852년 에도(江戸), 즉 지금의 도쿄(東京)에서 태어난 목조가(木彫家)입니다. 6세기,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로 나무에 불상을 새기는 일을 해 온 조각가들을 ‘불사(佛師)’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불사들은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일본 각지에서 활동하면서 저마다의 유파와 계보를 형성하였습니다. 다카무라 고운은 이 가운데 에도에서 활동한 ‘에도 불사’ 계보의 가장 마지막에 위치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목조에 입문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868년,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정부가 일시적으로 불교를 탄압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새로운 목조 불상 제작에 대한 수요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때마침 활발해진 서양과의 교역에서 정교한 세부 표현의 상아 조각이 큰 인기를 모으면서 일자리를 잃은 불사들은 나무 대신 상아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카무라 고운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우직하게 나무를 고집하며 일본의 오랜 목조 전통을 지켜냈습니다.

그렇지만 다카무라 고운이 일본 근대조각의 거장으로서의 명성을 얻게 된 것은 그가 단지 전통의 수호자였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의 거장으로서의 면모는 오히려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 정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독학으로 서양의 사생(寫生) 기법을 연구하여 전통 목조에 접목시킴으로써 일본 근대 조각계에 새로운 발전 방향을 제시하였습니다. 그의 대표작인 <늙은 원숭이(老猿)>(도쿄국립박물관 소장)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는 전통적인 불상에서부터 극사실주의적 동물 조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폭넓은 작품 세계를 지녀 일본 근대조각의 선구자로 불리기에 손색없는 인물이었습니다.

늙은 원숭이

<늙은 원숭이>, 다카무라 고운, 일본, 1893년, 나무, 높이 108.5cm,
도쿄국립박물관 소장(일본 중요문화재)

<늙은 원숭이>를 제작할 당시 다카무라 고운은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学校, 지금의 도쿄예술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는데, 같은 조각과 동료 교수로 다케우치 히사카즈(竹内久一, 1857~1916)라는 목조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본래 상아 조각가였지만, 나라(奈良) 고후쿠 사(興福寺)에 전하는 8세기 불상들을 보고 감명 받아 목조로 전향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고대 불상의 제작 기법 연구에 몰두하여 1893년 시카고 박람회에서 그 성과를 선보였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기예천>이었습니다. 이 상은 다카무라 고운의 <기예천>과는 달리 2미터가 훌쩍 넘을뿐더러, 고대 불상의 채색기법을 그대로 재현하여 화려하기 그지없습니다.

1. <기예천> 2. 이시야마데라(石山寺) 소장 『도상초(圖像鈔)』 중에서

1. <기예천>, 다케노우치 히사카즈, 일본, 1893년, 나무에 채색, 높이 214.5cm, 도쿄예술대학 대학미술관 소장
2. 이시야마데라(石山寺) 소장 『도상초(圖像鈔)』 중에서

기예천은 불교 세계에서 ‘기예’를 관장하는 천녀(天女)입니다. ‘기예’라는 단어가 요즈음은 ‘곡예’와 유사한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기예는 특별한 재주와 예술을 모두 아우르는 표현입니다. 『마혜수라천법요(摩醯首羅天法要)』 등의 경전에 의하면, 기예천은 대자재천(大自在天)이 여러 천녀들과 함께 기악(伎樂)을 즐기고 있을 때 홀연히 그의 머리카락 속에서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어서 그 모습을 묘사하길, 긴 천의로 온 몸을 감싸고 화려한 영락과 팔 장식으로 치장하였으며, 왼손은 위를 향해 꽃을 들고, 오른손은 내려뜨려 치맛자락을 살짝 쥐었다고 합니다. 11세기 무렵에 성립된 일본의 불교 도상 모음집인 『도상초(圖像鈔)』에서 왼손의 꽃바구니가 특징적인 기예천의 도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동아시아의 불교문화권에 기예천의 도상을 이용한 실제 조각이나 회화 작품은 한 점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오로지 근대에 들어 다케우치 히사카즈와 다카무라 고운 등이 제작한 <기예천>이 전할 뿐입니다.

이처럼 고대 경전과 도상 모음집에만 존재하던 기예천이 근대에 들어 갑자기 등장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뜻밖에도 고대 기예천 도상은 1890년, 도쿄미술학교의 한 강의실에서 재발견되었습니다. 당시 이 학교의 교장이었던 오카쿠라 덴신(岡倉天心, 1862~1913)은 이곳에서 일본 최초의 미술사 강의를 하였습니다. 강의 중에 그는 나라(奈良)의 아키시노데라(秋篠寺)에 전하는 불상들을 다루면서, 여기에 ‘기예천’으로 전하는 상이 있으나 입모양이나 손짓으로 보아 사실은 기예천이 아닐 것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 앞으로 목조가가 될 수강생들이 고대 기예천의 도상에 대해 연구해 보면 좋을 것이라 권하였습니다. 당시 이 강의의 수강생이자 오카쿠라 덴신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다케우치 히사카즈는 스승의 권유를 받아들여 즉시 연구에 돌입하였고 그 결과물로 1893년 시카고 박람회 출품작 <기예천>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오카쿠라와 다케우치는 불교의 ‘기예천’을 예술을 관장하는 그리스 여신 ‘뮤즈’에 대응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의 구상은 둘이 함께 건립에 관여한 교토국립박물관의 본관 페디먼트 조각에서 구체화되었습니다. 여기에는 건축의 신 비수갈마천(毘首羯摩天)과 예술의 신 기예천(伎藝天)이 각기 남녀 한 쌍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 급변하는 정치적 상황이 맞물리면서 둘의 구상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기예천의 도상에 대한 관심도 사그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평생 그들과 복잡하고도 질긴 인연을 맺고 있었던 다카무라 고운이 만년에 이르러 기예천의 상을 다시 한 번 조각하게 됩니다.

다카무라 고운의 기예천은 경전에서 설하는 도상을 그대로 따르고 있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그 얼굴의 생김새가 이국적입니다. 쌍꺼풀 진 눈과 높은 콧날, 그리고 뚜렷한 인중이 특히 그러하여, 묘한 신구의 조합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고대의 전통을 고집스럽게 중시하였던 다케우치 히사카즈와 달리 유연한 자세로 서양의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였던 다카무라 고운의 기예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엿보이는 지점입니다.

그렇다면 다카무라 고운의 <기예천>은 어떠한 연유로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까지 오게 되었을까요. 본래 이 작품은 1938년 개관한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의 소장품이었습니다. 1930년대의 서울에는 이미 근대적 성격을 띤 박물관이 두 곳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창경궁의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을 전신으로 하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이었고, 다른 하나는 1915년 경복궁에서 개최된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를 계기로 설립된 조선총독부박물관(朝鮮總督府博物館)이었습니다. 두 곳 모두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설립되어 한국의 고미술을 진열하였습니다. 그러나 3.1 운동 이후 총독부의 기만적 문화통치가 본격화되면서 고미술뿐만 아니라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미술관의 건립이 추진되었고, 그 결과 1933년부터 덕수궁의 석조전(石造殿)에서 일본의 현대미술품을 전시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5년 뒤 석조전 옆 신관(新館)이 완공되면서 이왕가박물관의 전시를 옮겨와 이곳을 이왕가미술관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당시 이왕가미술관의 운영을 담당하였던 이왕직(李王職)은 매년 전시와 함께 수집에도 힘을 기울여, 해방 전까지 약 200여 점의 일본근대미술 컬렉션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다카무라 고운의 <기예천>도 바로 이 컬렉션에 포함된 작품이었습니다. 이후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왕가미술관의 컬렉션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이 되었습니다.

다카무라 고운의 <기예천>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인 1940년, 그의 셋째 아들이자 금속공예가인 다카무라 도요치카(高村豊周, 1890~1972)로부터 구입한 것입니다. 현대미술을 전시하였던 이왕가미술관은 대부분 생존 작가들의 작품을 수집하였지만, 드물게 작고한 작가들의 작품을 구입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다카무라 고운과 같이 다방면에 걸쳐 활동하며 당시 미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가의 작품은 사후에라도 소장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막부(幕府) 말기에 태어나 격변의 메이지(明治) 시대에 활동한 그는 전통적 장인과 근대적 예술가의 경계선 상에 놓여있는 작가입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아직 진행 중이며, 그 결과에 따라 이 작은 기예천상이 들려주는 이야기도 변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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