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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03-06-02
- 조회수 2980
- 담당자 관리자 ()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也歟.
- [단심가丹心歌] -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이건무)은 호국의 달 6월을 맞이하여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상기시키고자 <이달의 문화재>로 고려말 충신 정몽주(鄭夢周, 1337∼1392)와 관련된 유물을 선정하였다. 그 중에서도 이한철(李漢喆, 1808∼1880 이후)이 중모重模한 『정몽주 초상화』, 『포은집圃隱集』, 선죽교 순절殉節 일화가 수록된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등은 국립중앙박물관의 대표적인 소장품으로 2층 로비에서 한달 간 전시한다.
정몽주(字 達可, 號 圃隱)는 영천永川 출생으로 초명은 몽란夢蘭·몽룡夢龍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그는 죽음으로써 절의節義를 지킨 충신이다. 즉 고려말 조준趙浚, 남은南誾, 정도전鄭道傳 등이 이성계李成桂를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李芳遠(훗날 太宗)이 '何如歌'로 정몽주의 의사를 타진하였으나 그는 '丹心歌'로 두 임금을 섬길 수 없음을 말하며 절의를 굽히지 않았다. 이에 이방원은 부하 조영규趙英珪 등을 시켜 개성 남쪽의 선죽교善竹橋에서 정몽주를 철퇴로 내리쳐 죽였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이후, 조선시대(1401년)에 권근權近의 청을 받아들인 태종太宗이 정몽주에게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수문관대제학修文館大提學 예문춘추관사藝文春秋館事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을 추증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려 정몽주의 충절이 인정받게 되었다.
정몽주는 충신으로 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특히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평가되는데 고려말 흐트러진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성리학 보급에 앞장섰다.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사회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며 개성에 5부 학당學堂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하는 한편 《대명률大明律》을 참작, 《신율新律》을 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침입해오는 왜구와 여진족을 물리쳤고, 명明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세공의 삭감과 5년간 미납한 세공을 면제받고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관계를 해결하였다. 일본에서는 왜구의 단속에 대한 확답을 받고 왜구에게 잡혀간 백성을 구해오는 등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나라를 바로 세우고 올바른 길을 택한 정몽주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 문의 :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398-5137, 이수경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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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몽주 초상
이한철 이모/ 61×35.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정몽주의 초상은 1389년 공양왕 즉위시 좌명공신에 녹봉되어 입각봉안된 이래 여러 차례 이모를 거쳐 가묘와 서원 등에 전해지고 있다. 경기도 용인 모현(慕賢)의 사당(祠堂)에도 전신상(全身像)이 하나 있으나 원본은 아닌 듯하다. 원래의 가묘본(家廟本)은 임진왜란중에 소실되고 왜란 후 광해군 12년(1619)에 화사(畵師) 권응(權鷹)이 영천 임고서원(臨皐書院)본을 모사해서 가묘에 봉안한 일이 있었다. 이로 보아 숭양서원(崧陽書院)본도 혹시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 소본(小本)이 원작부터 소본이었는지도 또한 알 수 없다. 안면 묘사에서 얼마간 양식화한 흔적이 보인다. 특히 두 눈과 안미(眼尾), 얼굴 묘법에 중모(重摸)의 형식적 특색이 보이지만 원작이 지니는 시대적 인상은 엿볼 수 있다. 고종 17년(1880) 가을 희원(希園) 이한철(李漢喆)이 중모한 작품이다.
이 초상화를 그린 이한철은 화원(畵院) 화가로 자는 자상(子尙), 호는 희원(希園), 희원(喜園) 또는 송석(松石) 등이다. 군수와 감목관을 지냈고, 현종, 철종, 고종의 어진 제작에 참여한 바 있다. 김수철, 허유, 유숙 등과 함께 김정희(金正喜)로부터 그림 지도를 받았다. 정형화된 남종화법(南宗畵法)과 김홍도(金弘道)의 영향을 따르며 산수와 화조(花鳥)를 그렸는데, 특히 초상에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 정몽주의 글씨 鄭夢周 遺墨
『포은집 圃隱集』 중에서/ 고려 高麗 1380
고려 우왕禑王 6년(1380) 11월에 이집(李集, 1314∼1387)에게 보내는 편지글
헤어진 뒤로 궁금한 마음이 많습니다. 요즈음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이 몸 또한 별탈 없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내가 이 달 19일 특별히 밀직제학(密直提學: 고려의 왕명의 출납, 군사상의 기밀을 맡았던 기구의 관리로 정3품에 해당)이 되어, 지위가 높아짐(亢滿)을 매우 두려워하여 밤낮으로 불안한데, 선생은 이 뜻을 알 것입니다. 끝으로 부디 몸조심하시기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정몽주 재배再拜
11월 24일
◈ 죽음으로 명예를 지킨 정몽주 夢周殞命
『오륜행실도 五倫行實圖』 중에서/ 조선 朝鮮 1859/ 송성문 기증
정몽주는 이성계李成桂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감지하고 숙청할 기회를 노렸다. 이를 눈치챈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李芳遠(훗날 태종)이 부하 조영규趙英珪 등을 시켜 개성 남쪽의 선죽교善竹橋에서 정몽주를 철퇴로 내리쳐 죽였다는 내용이다.
※ 위의 그림을 누르시면 큰 이미지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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