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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조선시대의 경주' 전 윤효전 초상(보물 제1502호) 특별 출품
  • 작성일 2013-11-06
  • 조회수 4045
  • 담당자 학예연구실 허형욱 ()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이영훈)은 특별전 ‘조선시대의 경주’(2013.9.17.~11.10.)에, 경주 부윤을 역임한 윤효전(1563~1619)을 전하는 보물 제1502호 초상화를 11월 6일(수)부터 11월 10일(일)까지 추가로 특별 전시합니다.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이자 문신이었던 기천沂川 윤효전은 서경덕徐敬德(1489~1546)의 문하인 민순閔純(1519~1591)에게 글을 배웠고, 1605년(선조38)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어섰습니다. 그는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1613년(광해군5), 선조宣祖(재위 1567~1608)의 맏아들 임해군臨海君(1574~1609)의 역모사건(이른바 계축화옥癸丑禍獄)을 진압한 공으로 익사공신翼社功臣 2등에 책록되었습니다. 그러나 대사헌의 자리에 있던 1617년(광해군9), 광해군의 계모인 인목대비仁穆大妃(1584~1632)의 유폐를 반대하다가 정치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역대 경주부윤의 명단인 『경주선생안慶州先生案』에 따르면, 윤효전은 50대 중반이던 1617년 4월 24일에 도임하여 1619년(광해군11) 2월 5일 별세하기까지 약 2년 동안 경주부윤을 지냈습니다. 그는 경주부윤 재임 당시 아들 백호白湖 윤휴尹鑴(1617~1680)를 낳았습니다. 윤휴는 훗날 청淸에 대한 북벌을 주장하고 주자 성리학의 독자적 해석을 시도했던 당대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습니다.


  이번 ‘조선시대의 경주’ 특별전에 특별 출품된 전 윤효전의 초상화는 바닥에 화려한 채전彩氈을 깐 뒤, 단령團領과 사모紗帽를 착용하고 공수拱手 자세로 교의交椅에 앉아 있는 17세기 전반의 전형적인 공신 초상 형식을 따랐습니다. 다만, 가슴의 공작흉배孔雀胸背와 허리에 찬 서대犀帶는 문관 1품의 복식에 해당하므로 그가 익사공신으로 책록되었던 1613년 때의 품계인 정2품 자헌대부資獻大夫와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들 윤휴가 신원 상소를 올려 작고한 아버지를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으로 영의정에 추증한 뒤, 그 기념으로 이 초상을 다시 제작했기 때문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윤효전은 이번 ‘조선시대의 경주’ 특별전에 출품된, 당대의 석학이던 한강寒岡 정구鄭求(1543~1620)의 문집인 『봉산욕행록蓬山浴行錄』에도 등장합니다. 한강 정구는 1617년 8월 30일부터 9월 2일까지 2박 3일간 경주를 들렀습니다. 이때, 경주부윤이었던 윤효전은 그를 영접하여 관아에서 하룻밤을 묵는 편의를 봐주었습니다. 이번 특별 출품은 한강 정구와 만났던 윤효전의 실제 모습을 확인해볼 수 있는 뜻 깊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전 윤효전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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