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등록일2023-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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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영상] 아껴 모은 연적에 담긴 나눔의 가치 - 의사 박병래
제각기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많은 도자기 중에서 그가 연적에 빠진 까닭은?
아껴 모은 연적에 담긴 나눔의 가치 의사 박병래.
박병래 선생은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최고의 결핵 전문의이자 강사로 명성을 날렸다.
<맹광호 전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장 인터뷰>
그때는 경성의전 부속병원에서 이미 이름이 난 의사였어요. 장래가 아주 확실하게 보장이 된 교수셨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때 막 시작하는 조그마한 성모병원에 원장으로 취임을 하세요.
‘성모병원’ 이름을 직접 짓다
<맹광호 전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장 인터뷰>
자애롭고 부드러운 성모님의 이미지를 담은 성모병원으로 이름을 붙이는 것이 환자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고 해서 성모병원이라는 간판을 세우고 시작을 하게 됩니다.
<박노원 박병래 선생 딸 인터뷰>
처음에 (성모병원 원장으로) 가실 때 월급을 300원 준다고 그랬더니 우리 할아버지가 그 다음날로 뛰어가서 우리 아들 바보로 만들려고 300원 주느냐구, 200원 주면 된다고 월급을 깎으셨다나봐요.
독실한 천주교도인 그는 저렴한 진료비를 받고 환자를 돌볼 뿐 아니라 무료 진료소를 설치하며 열과 성을 다하여 의술을 행했다. 그가 진료만큼이나 열정을 보인 것은 바로 도자기 유물 수집이었다.
또 다른 열정, 문화재 수집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인터뷰>
박병래 선생님이 의사로 계셨을 땐데 선배 일본 의사들이 무언가를 가지고 서로 토론을 하더래요. 그래서 이 양반이 ‘그게 뭡니까?’ 그랬더니 코웃음 치면서 ‘이게 한국거야’ 그래서 충격을 받았죠. 그래서 사명을 가지고 모으셨어요. 박병래 선생님은 한국 문방 수집하는 분들 중에서 제일이셨어요. 수집품들은 문방 연구의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지요.
오전 진료를 끝내고 서울의 12개 골동품 가게를 모두 도는 것이 그의 오후 일과였다.
<김완규 통인그룹 회장 인터뷰>
박병래 선생님은 조선의 선비같은 분이에요. 자기 봉급의 반을 가지고 물건을 샀으니까, 물건을 살 때 그 마음이 얼마나 애틋하겠어요. 골동품점에 오셔서 어제 본 물건 보여달라 그러시고 그걸 계속 만지시고 하다가 병원으로 돌아가시고는 했지요.
그는 도자기 중에서도 문방구, 그중에서도 그의 봉급으로 살 수 있는 연적들을 몹시 아꼈다. 그래서 별명 또한 ‘연적쟁이’였다.
‘연적쟁이’로 불리다
<박노원 박병래 선생 딸 인터뷰>
작은 연적 같은 것, 맨날 병원에 가실 때마다 윗도리 주머니에다가 넣고서, 그것을 맨날 만지고 다니셨어요.
한 점 한 점 아껴 모아 쾌척하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인터뷰>
늘 후손한테 그러셨다는 거예요. ‘이거 너희한테 한 점도 줄 수 없다. 이것은 국가에 언젠가 기증할거야’ 그러셨대요. 나중에 그걸 다 포장해서 박물관에 실어보내고, 병원에 계셔서 갔더니 내 손을 꼭 잡으면서 ‘정선생 참 고맙소, 내가 지금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소.’ 그러시더라고요.
<박노원 박병래 선생 딸 인터뷰>
박물관에 다 이사시켜놓고 그날 저녁에 ‘딸을 좋은데 시집보낸 것 같은 느낌이다’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며칠 있다 가셨죠.
박병래 선생은 보물 백자 난초무늬 조롱박 모양 병을 포함하여 한 점 한 점 아껴 모은 유물 총 362점을 기증하고 세상을 떠났다. 기증관이 개관하기 열흘 전이었다.
‘개인이 땀 흘려 번 돈으로 산 값진 유물들은 물론 개인의 소중한 재산이다. 하지만 그것을 빚고 구워낸 수 백 년 전 우리 조상의 기술만은 만인이 다함께 완상할 권리를 가지고 있을 법하다.’ - 수정 박병래 소장 ‘이조도자기’ 도록 중
나라가 어수선하던 시절, 빈곤과 기아에 허덕이던 사람들을 돌보고, 우리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전하고자 애쓴 박병래 선생. 그 정신이야말로 수정 박병래 선생이 우리에게 남긴 값진 유산이다.
그의 정신은 기증품과 함께 전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