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불교조각실의 가장 안쪽 방에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큰 철불이 전시 중입니다. 높이가 2.81미터, 그 무게는 무려 6.2톤에 이릅니다. 경기도 하남시 하사창동의 절터에 허리께까지 땅속에 묻혀있는 상태로 발견되어 1911년 이왕가박물관으로 옮겨졌습니다. 한쪽 어깨를 드러내는 법의와 무릎 앞에 펼쳐진 부채꼴의 주름, 오른손으로 땅을 짚으려는 듯 다리 위에 올린 손 모양이 석굴암 본존불과 닮은 이 불상은 고려시대 초기인 10세기에 제작되었습니다.
보물
공간을 압도하는 위용
불상의 높이는 2.81미터지만 1미터 높이의 대좌 위에 놓여 있기 때문에 관람자가 체감하는 높이는 4미터에 가깝습니다. 여기에 당당한 어깨와 2미터가 넘는 양 무릎 간 너비에서 나오는 장중한 체구 그리고 시커먼 ‘쇠’가 내는 괴체의 느낌은 그 앞에 서 있는 자를 압도합니다. 옆에 전시된 밝은 회색빛의 통일신라시대 석불이 품은 동글동글한 용모와 달리 그 표정에는 자비로운 웃음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수많은 불상이 있지만, 이처럼 신적인 거대한 존재와 마주하는 것 같은 엄숙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예는 흔치 않습니다.
본래의 봉안 장소에서 바라보는 느낌은 지금과 또 달랐을 것입니다. 불상은 화강암으로 만든 연화대좌 위에 안치되었을 텐데 대좌의 높이가 지금의 받침대보다 더 높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불상은 지금처럼 짙은 갈색이 아니라 빛나는 황금색이었을 것입니다. 무릎 부분에 옻칠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이는 금박을 입히기 전 표면을 마무리하기 위한 처리로 추정됩니다. 불교에서는 여래의 온몸이 금빛이며 이는 여래가 갖는 성스러운 신체적 특징의 하나라고 믿습니다. 이 때문에 어떤 재료로 불상을 만들든지 채색이나 개금을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 같은 전통이 고려시대 초기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포천 이동면 출토 철불에 남아 있는 도금의 흔적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모습이든 법당 안 금불의 모습이든 공간을 압도하는 위용은 여전했을 것입니다.
2 철불좌상, 경기도 포천 이동면, 고려 전기, 철, 높이 132.0 cm
이 불상이 봉안되었던 곳은 고려 초 유력 호족의 근거지
이 불상이 발견된 곳은 경기도 하남시 하사창동의 한 폐사지였습니다. 고려시대 행정구역상 광주(廣州)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1917년에 조선총독부가 행한 고적 조사의 보고서(『大正六年度古蹟調査報告』, 1920년 조선총독부 발간)에 따르면, 남쪽을 향한 철불이 동‧서로 2구 있었는데, 그 중에서 크기가 더 큰 불상이 이왕가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나머지 한 구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이후의 조사에서 이 폐사지와 인접한 곳에 천왕사(天王寺)라는 상당한 규모의 절이 있었던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밖에도 주변 약 1km 거리에 동사(桐寺)라는 절터와 그곳에서 발견된 직경 5.1미터의 팔각대좌를 비롯하여 교산동 마애약사불좌상 등 불교 유적과 관련된 유물이 산재해 있습니다. 가람의 규모와 철불의 크기, 함께 발견되는 유물의 수준으로 미루어 볼 때, 세력가의 후원이 뒷받침되어야 이 같은 조영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학계에서는 고려 초 이 일대를 장악했던 호족으로 태조의 16번째 비가 낳은 왕자 광주원군(廣州院君)의 외조부 왕규(王規)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왕규는 두 딸을 태조의 후비로 들일 정도로 광주 지역을 기반으로 세를 키워 나갔으나, 혜종 대인 945년 왕위 계승을 둔 세력 다툼에서 패하면서 몰락했습니다. 이에 따라 이 불상의 제작시기를 왕규의 활동시기인 10세기 전반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당시로선 철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불상을 만드는 데 철이라는 재료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것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전기에 이르는 비교적 짧은 시기의 일입니다. 현재 50여 예가 알려져 있습니다. 금동, 화강암, 나무 등 여타 재질로 만든 불상이 전국에서 발견되는 데 비해, 철로 만든 불상은 경기도 광주, 개성, 철원, 강원도 원주, 충남 서산, 청양, 충북 충주, 전북 남원 등 한반도 중부 지방에 밀집하여 분포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다시 말해 신라의 수도 경주 주변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신라의 변경 지역에서 주로 조성되었습니다.
철은 표면이 거친 데다 녹는점이 동(銅)보다 높고 온도가 내려가면 금방 굳어버리는 성질이 있어 표정과 손 모양, 옷주름 등 세부적인 표현에 공을 들여야 하는 불상의 제작에 선호되는 재질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전기의 장인들이 철을 선택하여 불상을 만들게 된 데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습니다. 당시 불사(佛事)를 둘러싼 사회적인 분위기는 예전만큼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신라 하대인 806년에는 애장왕(哀莊王)이 경제력과 승군을 보유한 사원과 귀족 세력의 결합을 우려하여 불교 사원의 창건을 금지한 바 있고, 834년에도 흥덕왕(興德王)이 신분별로 사용할 수 있는 재료를 규정하는 교서를 내리는 등 당시 만연한 사치 풍조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강했습니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불사를 일으키는 경우라면 되도록 문제의 소지가 없는 재료를 모색해야 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840년대에는 서해 해상무역을 주도하며 동의 국내 수급에 일조했던 장보고가 사망하고 당 무종(武宗)의 회창폐불(會昌廢佛)로 중국과의 교역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신라는 전반적인 동 부족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어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국가적 차원으로 다수의 사찰을 창건하도록 했을 때도 동의 공급은 여전히 수요를 따라잡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상을 만들 때 철은 몇 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동을 대체할 수 있는 재료가 되었을 것입니다.
국내에서는 낯선 재료였지만 중국에서는 성당기(盛唐期)부터 철불이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당에서 유학한 승려들은 철불의 유행을 보고 귀국했고, 이들의 경험 덕에 새로운 재료를 거부감없이 수용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시기 철불이 제작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습니다.
철을 쓰게 되었다고는 해도, 그 길은 까다로웠습니다. 주조 과정은 금동불을 제작할 때와 기본적으로 동일하지만, 주조가 끝난 뒤 표면상의 불완전한 부분을 끌로 손질할 수 있는 동에 비해 철은 녹는점이 높고 강도가 강해 한번 굳으면 다듬을 수 있는 범위가 훨씬 적었습니다. 그 크기 때문에 거푸집을 여러 판 결합시켜 주조해야 하는 대다수의 철불에는 판과 판의 이음새에 쇳물이 흘러들어 생긴 분할선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습니다. 이 철불에도 가슴과 허리, 무릎, 소매 등에 분할선이 보입니다.
왜 거대 철불이어야 했을까
이 글에서 다루는 철불의 크기도 과히 기념비적이지만, 더 놀라운 것은 우리나라 불교조각사에서 볼 때 이 시기의 철불에 유독 대형이 많다는 점입니다. 사찰에서는 왜 이렇게 큰 불상이 필요했을까요?
흔히 철불은 선종이 지방 호족의 후원을 받아 향촌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지방의 불사를 주도하면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값싼 재료인 철로 비용과 시간을 절감하여 만들 수 있었던 결과처럼 설명되곤 합니다. 하지만 태조가 창건한 왕륜사(王輪寺)에서 10세기 말 철불로도 추정되는 장육의 대형 노사나상을 주조하는 데 10년이 걸렸다는 기록(「王輪寺丈六金像靈驗收拾記」)을 보면, 철을 사용한 불사라고 하여 공력을 크게 아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철불이 조성되기 시작한 9세기는 선종 선문이 개창된 시기와 맞아떨어지고 실제로 선종 사찰에 철불이 많기는 하지만, 철이라는 재료가 선종과 사상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또한 철불이 지방 세력의 전유물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철원 도피안사(到彼岸寺) 철불처럼 지방 세력의 지도 아래 향도가 중심이 되어 조성된 예가 있는 반면, 보령 성주사(聖住寺)의 철불은 문성왕(文聖王)의 원불(願佛)로, 보원사(普願寺) 철불은 광종(光宗)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조성되었습니다. 기존에 지방 세력가나 선승의 주도로 조성되었다고 알려졌던 장흥 보림사(寶林寺), 남원 실상사(實相寺) 철불도 그 배경에는 선종 사찰과의 연대를 통해 지방 장악력을 최대한 유지하고 왕권을 회복하려 했던 신라 왕실의 후원이 있었다는 사실이 최근의 연구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당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승려들이 지방 사회에서 갖게 될 영향력은 중앙의 행정력을 잃어가는 신라 왕실이든 지방관을 미처 파견하지 못한 고려 초기의 왕실이든 절실하게 붙잡고 싶은 것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한편 9세기 말 경북 문경 봉암사(鳳巖寺)의 창건 연유를 살펴보면 왜 대불이 필요했는지 적어도 한 가지 목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봉암사가 세워진 지역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기근과 국가의 수탈로 도적화 된 농민의 항거가 자주 발생했습니다. 이에 “사원이 서지 않으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 을 우려한 지증대사 도헌(智證大師道憲, 824~882)이 “기와집을 짓고 사방으로 추녀를 드리워 지세를 누르고, 철불상 2구를 주조하여 절을 호위토록” 했다고 합니다. 봉암사의 사례에서 보듯 왕조가 저무는 사회적 혼란의 시기에 민심을 바로잡고 사람들을 교화할 목적으로 사원과 불상이 조성되었다면 위엄 있는 불상이 필요했을 것이고, 여기에 압도적인 크기는 가장 중요하고 효과적인 요소였을 것입니다. 그 대불이 철로 만들어졌던 것은 충주를 비롯한 주요 철 산지가 주변에 위치하고 당시에 확립된 조운로(漕運路)로 긴밀하게 연결된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철이라는 재료에 대한 접근성이 높았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라 생각됩니다.
최근 이사 이야기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에서 용산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그 무게 때문에 좀처럼 자리를 옮기지 않는 철불이 2004년 대대적인 이사를 한 차례 겪었습니다. 10만여 점에 이르는 유물 수송 프로젝트에서 가장 난이도 높은 하나였음은 물론입니다. 한지와 천 등으로 꼼꼼하게 포장을 마치고 지하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던 이 철불은 다른 작품처럼 건물 계단이나 승강기를 이용해 옮길 수 없어, 박물관 동쪽 벽면의 땅을 파내고 가로 세로 3미터의 벽면을 통째로 허문 뒤 크레인을 이용해 들어 올렸습니다. 지상으로 나온 불상은 무진동 트럭에 실려 조심스럽게 용산으로 이송되었습니다. 현대적 장비로도 이토록 어렵고 조심스러운 작업이기에, 천여년 전 이 불상을 조성하고 봉안하는 마음은 얼마나 절실한 것이었을까 미루어 생각해 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