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의 독창성 24선을 놓치지 마세요!
- 전시위치
선사고대관 > 구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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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구석기
- 재질돌 -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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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산업/생업 - 선사생활 - 생활구일체 - 생활구일체
- 크기L 23.6cm
주먹도끼는 끝부분이 뾰족한 타원형 석기로, 뭉툭한 부분을 손으로 쥐고 여러 용도로 사용했던 구석기시대 도구입니다. 돌의 한쪽을 떼어 낸 뒤 반대편을 다시 떼어 내 지그재그 모양의 양면 날을 만들었습니다. 구석기인들은 미리 전체적인 모양을 생각하고 계획을 세워 원하는 형태의 주먹도끼를 제작했습니다. 주먹도끼는 서유럽, 중동, 아프리카, 영국, 인도, 동아시아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발견되며, 대략 170만 년 전부터 10만 년 전까지 사용되었습니다. 주먹도끼를 만든 고인류는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주먹도끼는 연천 전곡리에서 출토된 것입니다. 1940년대 초반 미국 고고학자 모비우스(H. L. Movius)는 구석기문화를 유럽의 주먹도끼 문화권과 아시아의 찍개 문화권으로 분류하고, 동아시아 지역에는 주먹도끼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학설은 동아시아 지역이 주먹도끼가 발견되는 유럽・아프리카・중동 지역에 비해 문화적・인종적으로 뒤처졌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1978년 전곡리에서 동아시아 최초로 주먹도끼가 발견되자 세계 고고학계는 크게 놀랐고, 이러한 이분법적 이론은 폐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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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고대관 > 신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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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신석기
- 재질흙 - 연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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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식생활 - 음식기 - 음식 - 발
- 크기현재높이 38.1cm, 현재높이 25.9cm
덧무늬토기 이후에 등장한 것으로, 우리나라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여러 기하학적 무늬는 자연을 배경으로 살아간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토기는 서울시 암사동 집터유적에서 출토된 것으로 겉면을 삼등분하고 각각 다른 무늬로 장식하였다. 토기 아래쪽에 뚫린 두 개의 구멍은 깨진 토기를 임시로 수리하여 사용했던 흔적으로 추정된다. 이를 통해 당시의 토기는 누구나 만들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만드는 기술자가 따로 있었을 거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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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고대관 > 고조선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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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초기철기
- 재질금속 - 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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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군사 - 근력무기 - 도검 - 검
- 크기현재길이 10.4cm, 현재너비 3.9cm, 현재길이 5.6cm, 현재너비 2.3cm
우리나라의 청동기문화는 기원전 5세기~기원전 4세기경을 전후로 요령식 동검이 만들어진 시기와 한국식 동검이 만들어진 시기의 문화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식 동검은 한반도 특유의 청동기문화가 형성되었던 시기를 대표하는 유물입니다. 이전 시기의 요령식 동검에 비해 날이 좁고 직선 형태를 띠어 세형동검 또는 좁은놋단검이라고도 합니다. 자루를 따로 만들어 결합해서 사용하도록 한 점은 요령식 동검과 같으며, 검을 마연磨硏하는 방식이나 모양 등에 따라 제작 지역과 시기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초기의 한국식 동검은 허리의 마디가 뚜렷하지 않지만 후기로 갈수록 마디가 뚜렷해집니다. 한국식 동검은 대부분 무덤에서 잔무늬 거울과 청동 방울, 옥, 토기 등과 함께 출토됩니다. 특히 하나의 무덤에서 청동 유물이 다량 출토되는 예가 많은데, 무덤에 묻힐 ’한 사람’을 위해 쉽게 손에 넣을 수 없었던 청동기를 많이 넣은 것에서 당시 사회에 강력한 지배자가 등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전 시기부터 ‘검’은 단순한 실용기가 아니었습니다. 청동기시대 무덤에서 출토되는 대형 돌칼〔石劍〕이나 자루가 과장된 돌칼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거나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물건이자 때로는 숭배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한국식 동검 역시 무기 이상의 의미, 즉 당시 사회 지배자의 정치적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이라는 의미를 가졌습니다. 또한 한국식 동검이 제사장의 권위를 나타내는 잔무늬 거울 및 청동 방울과 함께 묻혔다는 것은 이 시기가 종교와 정치권력이 분리되지 않은 제정일치 사회였음을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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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고대관 > 고조선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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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초기철기
- 재질금속 - 동합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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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크기지름 10.5cm
잔무늬 거울은 한국식 동검문화를 대표하는 청동 거울입니다. 앞 시기의 거친무늬 거울이 중국 동북 지역과 연해주, 한반도, 일본열도에서 확인되는 것과 달리 잔무늬 거울은 대동강 이남에서 발견되어 한반도에서 창안해 제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잔무늬 거울은 거친무늬 거울과 마찬가지로 거울 뒷면〔背面〕 중앙에 2-3개의 고리가 달린 다뉴경多鈕鏡입니다. 그러나 거친무늬 거울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한 무늬가 새겨진 것이 특징입니다. 세밀한 무늬를 새기기 위해 가는 모래로 거푸집〔砂型〕을 만들고, 무늬를 새긴 거푸집 안에 녹인 청동을 부어 만들었습니다. 청동이 굳으면 거푸집을 깨뜨리고 무늬가 없는 거울면〔鏡面〕을 매끈하게 갈아 냈습니다. 잔무늬 거울은 거친무늬 거울보다 무늬를 새기는 기법이 더욱 발달해 정확한 동심원을 새겼으며, 선의 간격도 매우 좁아졌습니다. 청동기 제작 기술이 크게 발전한 결과 정밀한 무늬를 새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잔무늬 거울은 일상용품이라기보다 태양을 상징하는 의식용 도구 또는 종교적 권위의 상징물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잔무늬 거울은 신을 부르는 도구인 청동 방울, 정치적 권위를 드러내는 한국식 동검과 함께 당시 무덤에 집중적으로 묻히는데, 이로써 묻힌 사람의 사회 문화적 위상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또한 거울을 일부러 깨뜨려 넣은 경우도 종종 발견되어 당시 사람들의 매장 의례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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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고대관 > 고조선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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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청동기
- 재질금속 -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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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크기
청동 방울은 한국식 동검문화의 전성기에 한반도 중서부 지역에서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장대투겁 방울, 가지 방울 등의 청동 방울이 한국식 동검, 잔무늬 거울과 함께 무덤에서 확인됩니다. 이후 청동 방울을 비롯한 청동기 제작의 중심지가 한반도 동남부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이 지역에서는 닻 모양 방울, 누에고치 모양 방울, 장대투겁 방울 등이 주로 출토되어 방울의 종류와 제작 기법에 변화가 생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식 동검문화 단계에는 방울을 포함해 특이한 형태의 청동기가 많아집니다. 정확한 용도를 확인할 수 없어 이형異形 청동기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뛰어난 주조 기술과 무늬, 형태 등으로 볼 때 의례 때 사용하던 의기儀器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청동 방울은 당시 의례에서 ‘소리’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장대투겁 방울의 방울 부분이 점차 길어지고 안에 들어가는 방울의 크기도 더 커지는 것으로 보아 ‘소리’를 내는 기능이 더욱 강조되었을 것입니다. 이렇듯 청동 방울은 형태나 기능 면에서 한반도 청동기의 독자성과 성격을 잘 반영하는 대표 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전시위치
선사고대관 > 부여/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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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가야
- 재질유리/보석 -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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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사회생활 - 의례생활 - 상장 - 고대부장품
- 크기지름 1.5cm, 두께 1.1cm
투명한 수정을 여러 면으로 깎아서 만들어 엮은 이 화려한 목걸이는 김해 양동리 유적의 덧널무덤[木槨墓]에서 출토된 것입니다. 신체를 아름답게 꾸미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은 오래전부터 시작되어 신석기시대에는 이미 옥을 가공해 장신구를 만들었습니다. 옥으로 만든 장신구를 대표하는 목걸이는 거의 전 시기에 걸쳐 나타나는데, 재료나 형태 등으로 시기에 따른 특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는 벽옥璧玉 같은 녹색 빛을 띠는 자연 광물을 가공해 목걸이를 만들었습니다. 이후 철기문화를 특징으로 하는 삼한시대가 되면 수정・마노・호박 등 다양한 색을 가진 재료와 중국에서 유입된 유리 제작 기술로 만든 목걸이가 유행합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삼한 사람들은 금은보다 옥과 구슬을 귀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실제로 삼한의 무덤에서는 이 기록을 뒷받침하듯 각종 구슬이 풍부하게 출토됩니다. 이른 시기의 수정 구슬은 평양 석암리 219호 무덤 등 기원 전후의 낙랑 무덤에 함께 묻히기 시작합니다. 그 뒤 유리 제작 기술은 경주, 김해 등과 같은 진한・변한 지역에서 더욱 발달했으며, 이 목걸이는 삼한 사람들의 뛰어난 수정 가공 기술과 화려한 미적 감각을 잘 보여 줍니다. 이 밖에도 삼한의 유리 제작 기술은 더욱 발전해 거푸집을 사용하거나 잡아 늘이기, 감아 붙이기 기법 등으로 붉은색, 푸른색 등 색색의 유리구슬을 만들었습니다.
- 전시위치
선사고대관 >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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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고구려
- 재질종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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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크기
고구려에서는 생활 풍속, 장식무늬, 사신도 등 다양한 주제로 벽화를 그린 돌방무덤〔石室墳〕이 발전했습니다. 벽화무덤은 3세기 중엽부터 7세기 중엽까지 지속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주로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지안集安과 평양 일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그려지기 시작했으나, 고구려만의 문화로 재창조되어 더욱 발전했습니다. 벽화에는 고구려인들의 생활 모습과 종교, 사상 등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고구려사는 물론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복원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강서대묘는 널길과 널방이 지상에 있는 무덤으로, 잘 다듬은 대형 화강암을 사용해 벽과 천장고임을 축조했습니다. 무덤 안 돌 벽면에 직접 그림을 그린 벽화의 중심 주제는 상상의 동물인 사신四神입니다. 동쪽의 청룡, 서쪽의 백호, 남쪽의 주작, 북쪽의 현무를 널방 벽면에 가득 차게 그리고, 천장고임에는 연꽃, 비천飛天,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天人, 기린, 봉황을 비롯한 여러 신성한 존재, 인동당초무늬, 산악 등을 그려 넣어 도교 사상과 불교의 내세를 표현했습니다. 천장돌 중앙에는 황룡을 그려 넣었습니다. 기운생동하는 사신과 유려하고 다채롭게 표현된 천장 그림들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절정기 수준을 보여 줍니다. 전시 중인 강서대묘 모사도는 오바 츠네키치[小場恒吉]가 1930년경에 다시 모사한 것입니다.
- 전시위치
선사고대관 >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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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백제
- 재질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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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주생활 - 건축부재 - 벽/바닥재 - 전
- 크기지름 29cm, 두께 4cm
부여 규암면 외리의 사비 시기 절터에서 바닥에 나란히 깔린 상태로 출토된 벽돌입니다. 나무로 만든 거푸집〔范〕에 여러 무늬를 새긴 다음 흙을 밀어 넣어 찍고 가마에서 구웠습니다. 정사각형의 한 변 길이는 당척唐尺인 29㎝ 안팎이며, 네 모서리에는 홈을 파서 벽돌을 서로 연결해 고정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무늬 벽돌에는 산수무늬, 연꽃무늬, 봉황무늬 등 모두 8종류의 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상적인 세계, 상서로운 동물과 기운을 형상화하거나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벽사辟邪의 의미 등을 담아내 백제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조화와 비례, 우아함을 적절히 갖춘 백제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 줍니다. 산수무늬 벽돌에는 아래쪽으로 시냇물이 흐르고 그 뒤로 봉우리가 3개인 산이 펼쳐지며, 좌우로 기암절벽이 있습니다. 또한 가운데 가장 높은 산봉우리 위에는 큰 봉황이 날아오르려는 듯 양 날개를 활짝 펴고 있으며, 봉황 좌우에는 상서로운 구름들이 감돌고 있습니다. 신선들이 산다는 삼신산三神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데서 백제인의 도교적 세계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 전시위치
선사고대관 > 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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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신라
- 재질금속 - 철
-
분류
- 크기현재길이 26.6cm, 너비 6.6cm, 현재길이 9.9cm, 너비 4.4cm
미늘쇠는 길고 네모난 철판 옆면을 도려내 가시 모양으로 만들고, 아래쪽 구멍에 자루를 끼워 사용했던 것입니다. 미늘쇠는 대부분 무덤에서 출토되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손으로 들고 의식이나 장례 행렬에 사용했던 제사 도구로 추정됩니다. 가야를 구성했던 여러 정치체에서 미늘쇠가 크게 유행했는데, 그 중 아라가야에서는 가시 모양 대신 철판을 새 모양으로 잘라 붙인 매우 독창적인 것이 제작되어 성행했습니다. 미늘쇠에 달린 새는 반원 모양의 몸통에 둥근 머리가 달렸으며, 부리가 살짝 돌출되어 있는 모습인데, 가운데 철판을 중심으로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마치 나무에 붙어있는 새를 표현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새가 배치된 미늘쇠는 아직까지 가야 지역 외에서 출토된 적이 없기 때문에 가야만의 독창적인 유물로 생각됩니다. 한반도에 살았던 고대인들은 새가 영혼을 사후세계로 인도하는 존재로 인식했습니다. 무덤 안에 새 모양 토기를 만들어 부장하기도 하고 전래 문헌에는 장례 시에 새의 깃털을 부장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새가 부착된 미늘쇠 역시 죽은 이의 영혼을 저승으로 운반하기 위해 무덤에 부장된 것으로 가야인들만의 사후세계관을 알려주는 전시품입니다.
- 전시위치
선사고대관 >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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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신라
- 재질금속 -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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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의생활 - 관모 - 관 - 금관
- 크기전체높이 49.2cm, 높이 27.0cm, 지름 17.0cm
三個의 병으로 接着한 좁은 環條. 五個의 花樹狀立飾을 附飾. 環條의 兩線에는 二條의 打出珠文帶가 있고 다시 上中下 三段에 笠形座를 打出해서 中央에서 絲를 내서 小원板의 步搖를 달았음. 立飾에도 같은小步搖가 多數 달렸음.
- 전시위치
선사고대관 >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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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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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질흙 -
-
분류
- 크기
신라토기는 일반적으로 한반도의 고대국가 신라에서 생산되어 유통된 토기군을 의미하지만, 구체적으로는 4세기부터 통일신라 이전의 토기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릇의 종류로는 목긴 항아리, 굽다리 접시가 기본이며, 접시나 잔, 그릇받침, 항아리가 추가로 구성됩니다. 이 그릇들은 주로 무덤에서 출토되는데, 죽은 자를 위한 부장용 용기 또는 제사 그릇으로 판단됩니다. 고대 사람들은 죽으면 무덤 안에서 살아있을 때와 똑같은 생활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릇과 같은 일상생활 용품들을 그대로 무덤에 묻었습니다. 고구려, 백제와는 달리 신라에서는 용기를 대량으로 무덤에 묻는 관습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토기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토기가 대량으로 생산되었습니다. 토기의 대량생산은 처음에는 쉽지 않았지만 오랜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그 방법을 개발하였고, 질이 좋은 토기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일찍부터 자기를 개발했다면, 신라는 얇고 가볍고 자연유가 흐르는 독특한 토기 전통을 발전시켰습니다. 신라에서 용기를 대량으로 무덤에 넣는 제사 전통은 토기의 대량 생산을 유도하였고, 신라인들은 대량 생산을 위한 기술 혁신 과정에서 중국의 자기와는 다른 신라만의 독자적인 토기 스타일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오늘날 신라 토기는 세계사적으로 토기 기술의 최정점에 다다른 문화로 평가되고 있으며, 세계 어디에도 없는 독창적인 토기 문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전시위치
선사고대관 > 통일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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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통일신라
- 재질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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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크기높이 40.8cm
십이지는 육십 갑자의 단위를 이루는 12개의 요소를 제각기의 동물로 표현한 것으로, 12방위에서 국토와 중생을 지키는 수호신입니다. 십이지를 무덤에 부장하는 풍습은 중국 당에서 통일신라로 들어왔습니다. 통일신라의 왕과 귀족은 십이지상을 능묘 주위에 묻거나 호석에 배치하였습니다. 이 십이지상은 김유신 묘라고 전해지는 무덤 주위에서 출토되었는데, 갑옷을 입고 칼을 든 신장의 모습입니다. 신장은 화려한 장식의 갑옷이 사실적이며, 펄럭이는 천의天衣가 생동감이 넘치는 것이 특징입니다. 김유신 묘는 평복 차림의 십이지상을 봉분의 둘레돌(호석)에 배치하였고, 무덤 주변에도 이같은 십이지상을 묻었는데, 매우 독특한 사례입니다. 이는 김유신이 사후에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된 것과 연관해 무덤을 개축하면서 있었던 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 전시위치
중근세관 > 고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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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고려
- 재질금속 - 동합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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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식생활 - 음식기 - 음식 - 시
- 크기길이 24.7cm
숟가락은 물기 있는 음식 또는 국물을 떠 먹기 위한 도구로, 음식을 뜨는 부분인 술잎과 자루로 구성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청동기시대의 유적인 나진羅津 초도草島 조개무지에서 뼈로 만든 숟가락이 출토된 적이 있고, 공주 무령왕릉이나 경주 금관총・월지 등의 유적에서 청동 숟가락이 나와 늦어도 삼국시대부터는 숟가락을 널리 사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시대에 이르면 숟가락의 모양이 정형화되어 대체로 음식을 뜨는 부분은 납작하고, 크게 휘어진 자루의 끝이 제비꼬리 모양을 갖추게 됩니다. 이러한 숟가락은 고려시대 유적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어, 당시 사람들이 식생활에서 젓가락과 숟가락을 같이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옛날부터 숟가락을 사용했지만, 중국의 숟가락은 액체를 뜨는 국자에 가까운 것이었고 일본의 숟가락은 외국 사신을 위한 연회에서나 쓰이던 물건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식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우리와 중국, 일본의 식생활 방식은 예전부터 크게 달랐습니다. 이러한 습관의 차이는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 전시위치
중근세관 > 조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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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조선
- 재질종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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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크기가로 21.5cm, 세로 30cm
용비어천가는 조선 왕조를 창업한 태조太祖(재위 1392-1398)의 4대조인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와 태조, 태종太宗(재위 1400-1418)까지 6대 임금의 행적과 조선의 건국 과정, 관련 설화 등을 담은 장편 서사시입니다. 총 125장으로 구성되었으며, 한글(훈민정음)로 지은 본문 뒤에 한문으로 주석을 달았습니다. 훈민정음을 반포하기 1년 전인 1445년(세종 27)에 완성되었으며, 1447년(세종 29)에 처음 간행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실용적이며 과학적인 문자인 한글을 창제하기까지 세종을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은 연구와 시험을 거듭했습니다. 용비어천가는 이 과정에서 처음 쓴 작품으로 15세기 언어와 문학, 서체 등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입니다. 또한 훈민정음을 사용해 조선 왕조 창업을 노래함으로써 문자의 권위를 높이려 했음을 짐작하게 하는 자료입니다.
- 전시위치
중근세관 > 조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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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조선
- 재질종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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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문화예술 - 문헌 - 기타
- 크기세로 34.2cm, 가로 21.9cm
이 의궤는 1794년(정조 18) 1월부터 1796년(정조 20) 8월까지, 수원 화성 성곽을 축조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화성 성곽은 원래 10년 예정의 계획을 세웠으나 정조가 팔달산八達山에 올라 지시한 축성의 방략(御製城華籌略)에 따라 착공되어 32개월 만인 1796년(정조 20) 완성되었다. 이 책에서는 특히 축성법에 대해 상세히 다루고 있는데, 축성에 사용한 각종 기계들이 그려져 있다. 이 중에서 거중기擧重機는 서양의 과학 기술에 정통한 다산 정약용이 서양의 역학기술서力學技術書인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참고하여 제작하였다. 당시 40근의 힘으로 무려 625배나 되는 2만 5000근의 돌을 들어올려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 전시위치
서화관 > 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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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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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질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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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크기가로 13.0cm, 세로 21.5cm, 두께 4.0cm
조선의 임금들은 대부분 문예에 뛰어났습니다. 세자 시절부터 오랜 교육을 받았을 뿐 아니라 왕위에 올라서도 공부를 계속했기에 문장과 서예에 남다른 필력을 뽐낸 인물이 많았습니다. 새로 왕위에 오른 임금은 선대 임금들의 글씨를 수집하고 돌에 새기는 이른바 ‘어필석각御筆石刻’을 제작했습니다. 이는 역대 임금의 위업을 계승하고 효를 다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역대 임금의 문예文藝가 새겨진 어필석각은 선비의 나라 조선에서 왕실의 문화적 우월성과 정통성을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어필석각을 만든 또 하나의 목적은 임금들의 글씨를 탑본搨本해 널리 보급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열성어필列聖御筆』은 어필석각을 탑본해 엮은 서첩으로, 여러 부를 제작하여 유포했습니다. 역대 임금 가운데서도 선조宣祖는 명필가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선조는 스스로 많은 서예 작품을 남겼을 뿐 아니라 석봉石峯 한호韓濩라는 당대 최고의 명필을 발탁하고 후원해 한국 서예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서화실에는 조선의 역대 임금 가운데 문종, 성종, 선조, 인조, 효종, 현종의 글씨를 새긴 어필석각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어필석각에는 왕이 쓴 시문과 서찰, 큰 글씨의 서예 작품 등 다양한 글씨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선 왕실의 격조 높은 문예의 자취가 돌에 새겨져 영원히 전해집니다.
- 전시위치
서화관 > 불교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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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조선
- 재질섬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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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크기길이 913.3cm, 너비 599.9cm
괘불掛佛은 야외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큰 법회나 의식을 할 때 걸어 두는 대형 불화佛畫입니다. 대체로 8-9m 정도의 높이이며, 큰 괘불은 12m가 넘기도 합니다. 법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사찰 마당에 걸린 괘불을 보며 마치 부처가 의식 도량에 강림했다고 느낄 것입니다. 괘불은 중국과 일본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조선시대의 특징적인 불화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같은 전쟁과 자연재해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죽은 부모와 형제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사찰에서 천도薦度 의식을 빈번하게 행했습니다. 괘불은 죽어서 좋은 곳으로 가기 위해 미리 공덕을 쌓는 예수재豫修齋나 죽은 이를 위로하는 수륙재水陸齋에 걸려 망자의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했습니다. 영산재靈山齋, 관음재觀音齋 같은 다양한 불교 의식에도 괘불을 사용했습니다. 괘불과 조선시대 불교 의식은 오늘날까지 계승되어 한국 불교문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한 축이 되었습니다.
- 전시위치
서화관 > 목칠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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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조선
- 재질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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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주생활 - 생활용품/가전 - 가구 - 궤
- 크기높이 24.3cm, 길이 34.1cm, 너비 21.8cm
화각華角 기법은 중국이나 일본에서 찾아볼 수 없는 조선의 독창적인 장식 수법입니다. 소의 뿔을 펼쳐 얇게 깎아낸 각지角紙 뒷면에 그림을 그리고, 이를 목가구 등의 기물 표면에 부착하는 것입니다. 원래 바다거북의 등딱지인 대모玳瑁 뒷면에 색을 칠하여 장식한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모는 열대지방에서 수입하는 값비싼 재료였기에, 쉽게 구할 수 있는 소뿔을 반투명하게 가공하는 기술이 개발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소뿔의 크기에는 제한이 있어 각지는 작은 크기로 제작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작은 물건에도 수십 장의 각지가 사용되었습니다. 각지에 적색, 황색, 녹색 등의 안료로 그림을 그렸기에 화려한 장식성이 돋보입니다. 주로 안방가구와 빗 등의 여성용품에 화각이 사용되었습니다. 이 함을 장식한 화각에는 상상력 가득한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용, 호랑이, 해태, 코끼리 등의 환상적 동물들을 비롯해 동자와 모란 등 복을 부르는 상징물들이 각지 한 장 한 장에 따로 그려져 조합되었습니다. 바탕을 칠한 붉은색은 잡귀를 쫒고 공간을 화사하게 꾸며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조선시대 여인들은 안온한 삶과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을 이 화각함에 담아 소중히 다루었을 것입니다.
- 전시위치
조각공예관 > 불교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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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조선
- 재질금속 - 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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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종교신앙 - 불교 - 예배 - 불상
- 크기높이 11cm, 무릎너비 6cm, 어깨너비 4.9cm
경기도 남양주에 위치한 수종사水鐘寺의 금당 옆에는 아담한 팔각오층석탑이 서 있습니다. 1957년 이 석탑을 해체 수리할 때 안에서 무려 30구의 불상이 발견되었습니다. 전시된 불상과 보살상은 1628년(인조 6) 인목대비가 소원을 빌며 석탑 안에 넣은 것입니다. 불상 한 구 한 구 조금씩 다른 손 모양과 장식裝飾을 하고 있어 여러 구를 모아서 보면 율동감이 느껴집니다. 대형 불상에서는 표현하기 어려운 귀여움이 얼굴에 가득합니다. 불상은 공통적으로 머리가 크고 동그란 반면 하체는 좁고 납작합니다. 어깨는 움츠러들고 얼굴은 앞으로 튀어나와, 고려시대까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 줍니다. 조선시대에 들어 전각 내부에서 행하는 의례가 많아지면서 불단佛壇이 뒤로 물러나고 높이도 높아졌는데, 고려시대와 달라진 조선 불상의 모습은 높이 봉안한 불상을 가까운 거리에서 예배해야 했던 건축상의 변화에 따라 조정된 것으로 해석됩니다.
- 전시위치
조각공예관 > 금속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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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고려
- 재질금속 - 동합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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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종교신앙 - 불교 - 의식 - 범종
- 크기높이 174.2cm, 입지름 96.4cm
통일신라 동종을 계승한 가장 오래된 고려 시대 종입니다. 정면을 응시하고 보주를 물고 있는 용과 제작 연대를 새긴 위패 모양의 틀은 고려 시대에 나타나는 새로운 요소입니다. 위패 모양의 틀에는 요나라 통화統和 28년(1010년) 성거산 천흥사에서 만들었다는 글자가 새겨 있습니다.
- 전시위치
조각공예관 > 도자공예-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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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고려
- 재질도자기 - 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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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식생활 - 음식기 - 저장운반 - 병
- 크기높이 34.5cm, 입지름 5.8cm, 몸통지름 21.2cm
모란꽃이 화사하게 표현된 매병입니다. 모란은 여느 꽃보다 빛깔이 곱고 듬직하여 부귀를 상징하는 꽃으로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이 매병의 몸체에는 모란 가지 세 개를 흑백 상감으로 묘사한 뒤 꽃잎에 동화 기법으로 붉은색을 입혀 화려함을 더했습니다. 주성분이 구리인 안료로 무늬를 그린 뒤 구워내면 무늬가 선홍색으로 나타나는 동화 기법을 이용하여 고려청자의 무늬를 나타낸 경우는 매우 드물고, 이처럼 매병을 장식하는 데 사용한 예는 더욱 찾기 어렵습니다.
- 전시위치
조각공예관 > 도자공예-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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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고려
- 재질도자기 - 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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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식생활 - 음식기 - 음식 - 병
- 크기높이 28.8cm, 입지름 4.8cm, 몸통지름 17.9cm
고려청자는 고려시대 공예를 대표하며 세계적으로 명성을 끼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고려시대에도 백자는 있었습니다. 고려시대 초기에 만든 벽돌가마[塼築窯]에서 백자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이후 대표적인 청자 생산지인 부안이나 강진 등의 가마터에서도 백자가 발견되었습니다. 고려시대의 각종 백자는 청자의 형태나 문양을 본떠 만들었으며, 상감청자가 유행했던 시기에는 상감청자의 영향을 받은 백자도 제작되었습니다. 이 백자매병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몸체를 참외모양으로 여섯 등분하여 골을 만들고, 각 면마다 마름모모양으로 상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청자 태토로 면상감面象嵌 하였습니다. 여기에 모란, 갈대, 버드나무 등을 흑백상감해서 넣었습니다. 청자 태토로 상감하여 고려청자와 백자를 하나의 그릇에 응용한 것입니다. 백자에 청자 태토를 상감해 넣고 다시 그 안에 상감하여 무늬를 나타낸 것은 백자와 청자를 능숙하게 만들었던 중국에서도 잘 볼 수 없습니다. 굽는 과정에서 병의 아래쪽이 약간 주저앉아 찌그러졌지만, 광택이 좋을뿐더러 고려백자와 청자가 혼합된 고려 장인의 창의성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 전시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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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조선
- 재질도자기 - 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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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크기높이 17.6cm, 길이 27.8cm, 입지름 5.3cm, 바닥지름 8.4cm
분청사기는 “분장회청사기”의 준말로, 하얀 백토인 ‘분粉’을 발라 장식한 도자기라는 뜻입니다. 도자기 표면을 장식하는 기법이나 무늬는 각 시대가 추구했던 미감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다양한 기법으로 장식한 분청사기에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심미안이 구현되어 있는데, 특히 어두운 바탕흙과 분장한 백토의 절묘한 대비와 친근하면서도 간결하게 표현한 무늬가 돋보입니다. 중국과 일본을 비롯해 다른 문화권에서는 볼 수 없는 조선만의 자연스러움이 넘치는 공예미가 아주 매력적입니다. 가로로 길쭉한 원통형 몸체 위에 주둥이를 단 장군은 흐르기 쉬운 액체를 담아 저장하거나 이동할 때 편리하도록 만든 그릇입니다. 이 장군을 장식한 조화 기법은 백토를 바른 그릇 표면에 끝이 뾰족한 도구를 이용하여 자유롭게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한쪽 면에는 수초를 물고 여유롭게 헤엄치는 물고기를 묘사하고 반대쪽 면에는 모란 잎 무늬를 생동감 넘치는 모양으로 장식했습니다. 물고기는 알을 많이 낳아 ‘다산多産’을 상징합니다. 중국에서는 물고기 글자 발음이 ‘넉넉함’을 뜻하는 글자의 발음과 같아서 좋은 의미를 담아 공예품 무늬로 애용했습니다.
- 전시위치
조각공예관 > 도자공예-백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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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조선
- 재질도자기 - 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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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크기높이 31.4cm, 입지름 7cm, 바닥지름 10.6cm
풍만한 양감과 유려한 곡선이 만들어 낸 조형미가 조선 전기에 제작된 백자 병 특유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줍니다. 병의 잘록한 목을 휘감고 내려오는 끈 한 가닥에 부드러우면서도 거침없는 모습이 풍류와 멋스러움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중국 당나라 시인 이백이 지은 시 가운데 “술병에 푸른 실을 묶어 술 사러 보낸 동자는 왜 이리 늦는가”라는 구절을 구현한 것과 같은 이 병은 굽 안바닥에서 ‘니ᄂᆞ히’라는 한글이 확인되어 1443년 훈민정음을 창제한 뒤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무늬가 없는 순백자나 푸른색 청화안료로 그림을 그려 넣은 청화백자가 큰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이와 같이 철화 안료를 사용해 간결하면서 단순한 끈 무늬를 장식한 백자 병은 매우 드문 예에 속합니다. 거침없이 그어 내린 힘찬 선은 장인의 숙련된 경지를 유감없이 드러내며 절제되면서도 과감한 표현과 구성은 현대적인 미감과도 맞닿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