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기시대 사람들은 빙하기가 끝나고 따뜻해진 환경에 적응하며 다양한 재료를 이용하여 도구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생존의 문제를 넘어 몸을 꾸미는 꾸미개나 미적 감각을 발휘한 예술품도 만들기 시작합니다. 도구나 꾸미개를 만드는 데 흙, 돌, 뼈 등 다양한 재료가 활용되었는데 그중 바닷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개도 있습니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바다 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음식 재료로 조개를 많이 채취해 먹었습니다. 조개껍질은 대부분 버려졌지만 색깔, 강도, 형태에서 특별한 것들은 새로운 물건으로 재탄생했습니다.
조개 팔찌, 부산 동삼동 유적, 신석기시대, 길이 7.2cm, 신수22281 등
신석기시대의 중요한 자원, 조개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유적의 대부분은 바닷가에서 먹고 버린 조개껍질이 쌓여 만들어진 조개무지입니다. 유적들의 겉모습을 보고 조개가 주식이었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조개의 속살은 매우 적고 열량도 낮아서 식물·동물·작물 등 다양한 식재료 가운데 하나로 비중이 그리 크지 않았으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사시사철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조개는 신석기시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식재료였을 것입니다.
신석기시대 조개무지에서 발견되는 조개의 종류는 백합, 꼬막, 고둥, 소라 등 매우 다양합니다. 소라나 전복같이 깊은 바닷속에 서식하는 것도 채취했습니다. 그중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가 오늘날에도 많이 먹는 굴입니다.
조개로 만든 것들
조개껍질로 만든 도구는 실용 도구와 비실용 도구로 나뉩니다. 실생활에서 사용한 도구에는 고기잡이용 추와 낚싯바늘, 칼, 그릇 등이 있습니다. 또한 토기의 겉면을 다듬을 때도 조개껍질을 사용했습니다. 꾸미개로는 팔찌, 목걸이, 가면 등이 있습니다. 실용 도구로는 굴처럼 손쉽게 채취 가능한 식재료들을 이용했지만, 비실용 도구는 식용이 아닌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채취했습니다. 특히 팔찌는 아주 단단한 재질인 투박조개로 만들었는데, 투박조개는 육지에서 가까운 얕은 바다가 아니라 5~20m 깊이의 바닷속 모랫바닥에 서식해서 쉽게 구할 수 없었습니다.
부산 동삼동 유적의 조개 팔찌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꾸미개인 조개 팔찌는 조개무지 토층이나 주거지, 무덤에서 발견됩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신석기실에 전시된 조개 팔찌는 1971년 조개무지 유적인 부산 동삼동에서 발굴되었습니다. 총 71점 중 흰삿갓조개 1점, 피조개 4점을 빼고는 모두 투박조개를 사용했습니다. 완벽한 형태의 팔찌도 있지만 제작 중이거나 실패한 미완성품도 다수 발견되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조개 팔찌, 부산 동삼동 유적, 신석기시대, 길이 2.3~8.1cm, 신수22281
조개 팔찌는 1999년 부산박물관이 동삼동 유적을 다시 발굴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무려 1,500점에 달하는 조개 팔찌가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조개 팔찌 외에도 주거지 안에서 조와 기장이 발견되었고, 독널과 사슴이 새겨진 토기 등 새로운 자료들이 나와 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많은 자료 덕분에 조개 팔찌를 만드는 과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먼저 정수리 부분을 때려 구멍을 내고 손목에 끼울 수 있을 정도로 점차 넓힌 후 바깥 테두리를 다듬고 전체를 갈아 모양을 잡았습니다. 제작 중에 깨진 팔찌가 상당히 많은데 매우 단단한 투박조개로 완제품을 만드는 데는 실패율이 굉장히 높았음을 보여줍니다. 동삼동 유적 조개 팔찌의 출토량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신석기시대 단일 유적에서 발견되는 조개 팔찌의 양은 대개 10점을 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산 동삼동 유적에 살던 사람들은 조개 팔찌를 만드는 데 특화된 집단이었고, 그 목적은 집단 내의 소비를 넘어서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조개 팔찌를 착용한 사람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구멍을 뚫은 조개를 진짜 팔찌로 사용했을까요? 다행스럽게도 통영 상노대도 산등 유적, 여수 안도 유적, 부산 가덕도 유적의 무덤 안에서 조개 팔찌를 착용한 인골이 발견되어 그 쓰임새를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통영 상노대도 산등 유적의 여성 인골은 왼쪽 팔목에 투박조개와 삿갓조개로 만든 팔찌 3개를 착용했습니다. 여수 안도 유적에서 발견된 1호 무덤의 남성 인골과 3호 무덤의 여성 인골은 오른쪽 팔목에 각각 바위굴 팔찌 1개, 투박조개 팔찌 5개를 착용했습니다. 부산 가덕도 유적에서도 1호 여성 인골, 6호 남성 인골, 14호 여성 인골의 손목에서 조개 팔찌가 발견되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당시 사람들이 구멍이 뚫리고 매끈하게 잘 갈아 만든 조개 제품을 예상대로 팔찌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팔찌 착용에 성별 구분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부산 가덕도 유적에서는 조금 특이한 양상이 확인됩니다. 1호 여성 인골의 경우 오른쪽과 왼쪽 손목에 각각 1개씩 피조개 팔찌를 차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멍이 뚫린 피조개 9점이 얼굴에서 배까지를 덮고 있었습니다. 또한 조개 팔찌의 안쪽과 바깥쪽이 가지런하게 다듬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피조개에 구멍을 뚫고 안쪽 부분만 일부 가공했을 뿐입니다. 6호 남성 인골의 경우 투박조개와 피조개로 만든 여러 점의 팔찌를 오른쪽과 왼쪽 손목에 끼었고, 가슴에는 20여 점의 조개 팔찌로 만든 목걸이를 걸었습니다. 이 6호 인골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신석기실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신석기시대에는 대부분 손목에 조개 팔찌를 여러 점 착용했지만, 일부는 펜던트나 장례의식 등 다른 용도로도 사용했습니다. 또한 죽은 자를 치장하려고 만든 조개 팔찌는 가지런하게 다듬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6호 인골의 전시 모습, 부산 가덕도 유적, 신석기시대
조개 팔찌가 말해주는 사회상
조개 팔찌의 주재료인 투박조개는 동남 해안 깊은 바닷속 모랫바닥에 서식하는 것으로 쉽게 구할 수 없는 재료입니다. 부산 동삼동 유적의 조개 팔찌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투박조개에 마모와 벌레가 파먹은 충식(蟲蝕)의 흔적이 있어서 폐사하여 해안가에 떠밀려온 조개를 이용한 것이 아닐까 추정되기도 합니다. 투박조개와 같이 특정 지역에서만 나는 소재가 원산지와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발견될 때는 양 지역 간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투박조개와 덧무늬토기가 단양 상시 바위그늘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는 한반도 중부 내륙지역과 동남 해안지역 간의 교류를 시사합니다. 단양 금굴이나 영월 쌍굴 등 중부 내륙지역이나 군산 노래섬, 안면도 고남리, 서산 대죽리 등 서해안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도 투박조개 팔찌가 발견되었습니다.
이처럼 부산 동삼동 유적에서 발견된 1,500점이라는 어마어마한 수량의 조개 팔찌는 제작 집단 내부에서 소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변 지역과 교류를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한반도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 일본 지역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동삼동 유적에서는 규슈산[九州産] 흑요석이나 조몬토기[繩文土器]처럼 일본산 재료와 유물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부산 동삼동 유적의 조개 팔찌는 기원전 3천 년을 전후한 신석기시대 중기 토층이나 주거지에서 가장 많이 출토됩니다. 부산 동삼동 유적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조개 팔찌라는 희소성이 높은 제품을 매개로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광범위한 영역에서 활발하게 교류했음을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