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히라쓰카 운이치[平塚運一]의 <백제의 옛 수도[百濟古都]> : 류승진

 <복희여와도>, 7세기, 투루판 아스타나 무덤, 삼베에 색, 188.5×93.2cm, 본관4027

<복희여와도>, 7세기, 투루판 아스타나 무덤,
삼베에 색, 188.5×93.2cm, 본관4027

해와 달 그리고 북두칠성을 포함한 별자리들이 떠 있는 하늘 한가운데 복희(伏羲)와 여와(女媧)라는 이름의 두 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마주 보는 두 남녀 신은 마치 한 몸인 것처럼 표현되어 있습니다. 어깨동무를 한 두 팔은 하나로 붙어 있는 듯 그려졌고, 하나의 치마를 공유하며, 뱀의 모습을 한 하반신은 서로 얽혀 있습니다. 7세기 투루판[Turpan, 吐魯番]에서 제작된 이 기괴하고도 신비로운 그림은 어떤 그림이며 어디에 사용되었던 것일까요?

본관4027 복희여와도의 발견

복희여와도는 신장웨이우얼 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 투루판 지역에서 국씨고창국(麴氏高昌國)과 당(唐) 지배 시기[西州時期]에 해당하는 6세기부터 8세기 중반까지, 무덤 내부를 장식하기 위해 제작되었던 그림입니다. 중앙아시아의 유적과 유물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일본의 오타니[大谷] 탐험대는 1912년 투루판 고창국 귀족들의 공동묘지인 아스타나[Astana, 阿斯塔那] 고분의 한 무덤 안에서 이 그림을 발견했습니다. 탐험대원인 요시카와 고이치로[吉川小郞]는 그의 일기에 당시의 묘실 내부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분묘에서 연도를 비스듬히 따라 지상으로부터 20~30척 깊이까지 내려가면 묘실에 도달한다. 내부의 목관 또는 시신으로부터 약 2척 높이의 천장에는 목관과 비슷한 크기의 인수사신(人首蛇身)의 신상화(神像畵)가 마치 모기장처럼 매달려 있다. 완전하게 걸려 있는 것도 있으나 대부분은 끈이 부식되어 천장에서 떨어져 시신 또는 목관 위를 덮고 있다.

 투루판 아스타나 고분 전경

투루판 아스타나 고분 전경

즉 복희여와도는 묘실 천장에 벽화를 대신해 부착한 그림이었던 것입니다. 현재 그림 가장자리에 나 있는 구멍들은 그림을 천장에 고정하기 위한 흔적으로 보입니다. 이 그림은 발견 후 다른 수집품과 함께 일본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나 니시혼간사[西本願寺]의 영적 지도자였던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가 직위에서 사임함에 따라 1916년에 조선총독부박물관에 입수되었고 해방 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이 되었습니다. 입수 당시 발굴품 목록을 보면, 이 그림은 ‘남녀합체도(男女合體圖)’라는 명칭으로 “장군(將軍)의 묘에서 발굴된 것”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장군’이 붙은 관직명은 국씨고창국의 관직체계에서 고하를 막론하고 다수 존재하기 때문에, 아쉽게도 이 그림이 있었던 무덤 주인에 관한 정보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은 다른 복희여와도들 중에서도 대형에 속하며, 그 어느 것보다 색조의 대비가 선명하고 균형 잡힌 구성을 보여줍니다. 마치 한 폭의 초상화를 보는 듯 인물 표현이 세련된 걸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이 복희여와도에 걸맞은 높은 신분과 직위를 갖고 있었을 묘주가 과연 누구인지 더욱 궁금해집니다.

투루판에 등장한 고대 중국의 두 창조신

복희와 여와는 중국 고대의 전설적인 제왕인 삼황오제(三皇五帝) 가운데 삼황에 속하며 천지창조, 인류의 기원과 문명의 발생을 상징하는 남녀 신입니다. 복희는 천지의 만물을 포함하는 팔괘(八卦)를 만들고 불을 발명했으며, 그물을 만들어 고기 잡는 법을 인류에게 전해주었다고 합니다. 여와는 인류를 만들어냈습니다. 복희와 여와는 일반적으로 상반신은 사람, 하반신은 뱀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화면 오른쪽 남신 복희는 구부러진 자[矩]와 먹물통[墨壺]이 달린 끈을 손에 쥐고 있으며, 왼쪽의 여신 여와는 가위처럼 생긴 컴퍼스[規]를 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주를 창조할 때 쓰는 도구들로, 둥근 하늘과 네모난 땅으로 이루어진 중국의 전통적인 우주관과 관련됩니다.

두 신이 등장하는 신화는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 당대(唐代)에 이르는 여러 문헌에 전승됩니다. 한대(漢代)까지의 문헌에는 두 신 사이에 관련성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반면 한 쌍의 복희와 여와를 회화 또는 조각으로 표현하는 전통은 전한(前漢) 시기부터 존재했습니다. 뤄양[洛陽]과 산둥[山東], 쓰촨[四川] 지역을 중심으로 석실묘 또는 사당의 화상석(畫像石)과 벽화에 복희 여와의 도상이 그려진 예가 있습니다. 한대에는 도교(道敎)나 원시 신화를 숭상하는 풍조가 있었으며, 장례를 성대하게 지내는 후장(厚葬)이 유행하였습니다. 이는 일월(日月), 사신(四神), 동왕공(東王公), 서왕모(西王母)를 비롯하여 복희 여와 도상의 등장을 촉진시켰습니다. 그러나 당 시기가 되면 화상석묘의 쇠퇴와 함께 중원 지역의 묘실 장식에서 복희 여와 도상은 자취를 감추며, 천문도(天文圖)와 사신도 정도만이 명맥을 유지하게 됩니다.

중원의 이러한 흐름과는 반대로, 투루판에서는 국씨고창국시기부터 서주시기의 200년 동안 복희여와도가 활발히 제작되었습니다. 발굴된 아스타나 전체 고분 중 60~70퍼센트의 고분에서 복희여와도가 발견되었으며, 공개된 것만 60여 점에 이릅니다. 또한 투루판의 복희여와도는 두 신이 부수적인 모티프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된 화제의 인물화로 제작된 것이 중요한 특징입니다. 이 같은 사실로 당시 복희여와도가 투루판 장례 문화를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중앙아시아 미술의 영향이 남아 있는 과도기 작품

<복희여와도>의 세부   <복희여와도>의 세부

 천불도단편, 6-7세기, 투루판 베제클리크 석굴 제18굴, 흙벽에 채색, 33.5×24.5cm, 본관4054 천불도단편, 6-7세기, 투루판 베제클리크 석굴
제18굴, 흙벽에 채색, 33.5×24.5cm, 본관4054


투루판 지역의 복희여와도는 중국 전통 신화를 주제로 합니다. 초기의 예들은 그림 세부 표현에서 중앙아시아 미술의 특징이 감지되지만, 당의 지배를 받게 되는 7세기 중엽부터는 중국적인 영향이 점차 짙어지는 경향을 보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복희여와도는 얼굴과 손의 음영 표현, 의복 표현, 일월 표현 등에서 중앙아시아의 영향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과도기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두 인물의 눈 주변과 귓바퀴, 목과 손의 가장자리를 따라 붉은 선을 칠해 입체감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는 쿠차[Kucha, 龜玆] 석굴 인물 벽화에도 나타나는 중앙아시아 인물화 표현의 특징입니다. 이러한 음영법은 동시기 투루판 베제클리크[Bezeklik, 柏孜克里克] 석굴사원의 천장을 장식했던 천불도(千佛圖)의 표현에도 보여, 당시 투루판 지역의 인물 표현에 폭넓게 구사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복희 여와의 겉옷 소매는 좁고, 속옷 깃은 동그란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전형적인 중앙아시아 의복의 특징입니다. 또한 해와 달의 내부를 방사선(放射線)으로 그리고 바깥 둘레에 연속된 구슬 문양을 둘러 표현한 점과 해와 달을 인물의 위아래에 각각 배치한 점은 쿠차 지역 여러 석굴사원 천장에 그려진 천상도의 일·월천(日·月天)과 매우 유사합니다. 이와 같은 표현 방식에서 두 지역 간의 영향 관계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한편 다른 복희여와도가 대개 비단에 그려진 것과 달리 이 그림은 마(麻)를 이용해 그렸습니다. 마에 그려진 복희여와도는 당 지배 초기인 7세기 후반부터 나타나므로, 이 그림의 제작 시기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와의 이마와 뺨에 그려진 화전(花鈿)과 엽전(靨鈿)은 전형적인 당나라 여인의 화장법으로, 서역 미술의 특징이 뚜렷이 반영된 복희여와도가 점차 당 화풍의 영향을 받아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국씨고창국의 장례 문화: 기성품으로 대량생산된 장례용품

투루판에서 출토된 복희여와도는 어김없이 화면 중앙에 상반신은 사람, 하반신은 뱀으로 된 복희와 여와가 서로 엉켜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위아래에 일월, 주변에 별자리가 배치되어 있어 매우 정형화된 형식을 보여줍니다. 반면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화가들이 규범을 따라 반복적으로 대량 제작했기 때문에 오히려 세부 표현에서는 화가의 개성이 드러나며 양식적 범위도 넓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같은 화가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들도 발견됩니다.

 1. 묘표, 582년, 투루판 카라호자 무덤, 흙에 채색, 35.5x35.5cm, 본관3813 <br/>  2. 구슬무늬로 장식한 그릇, 6-7세기, 투루판 아스타나 무덤, 토기, 본관3833 등

1. 묘표, 582년, 투루판 카라호자 무덤, 흙에 채색, 35.5x35.5cm, 본관3813
2. 구슬무늬로 장식한 그릇, 6-7세기, 투루판 아스타나 무덤, 토기, 본관3833 등
복희여와도에 쓰인 삼색(검정, 빨강, 흰색)과 별들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연주문(連珠文)은 같은 아스타나 무덤 내 죽은 자의 머리맡에 놓였던
그릇의 채색 및 문양과도 일치합니다.

사실 복희여와도에서 보이는 대량생산과 정형성이라는 특성은 동시대의 아스타나 고분 묘실 입구에 놓였던 묘표(墓表)에도 나타납니다. 복희여와도의 출현과 함께 아스타나에는 같은 가문의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분묘들의 주위를 담으로 둘러싸는 형태의 가족 묘역[墳院]이 조성됩니다. 분묘의 수도 이전보다 3배 이상 증가하며 그 구조와 규모는 일정해지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리고 현존하는 200여 점 이상의 고창국시대 묘표 대부분은 정방형 벽돌로 만들어졌습니다. 묘표에는 죽은 자의 업적을 칭송하고 죽음을 애도하는 내용이 아니라 이름과 역임했던 관직만이 사망일과 함께 간략히 기록되었습니다. 국씨고창국은 6세기 전반 나라의 안정을 바탕으로, 왕족을 정점으로 한 관직 위계에 의해 신분이 엄격하게 규정되는 국가질서를 확립했습니다. 고위 관직에 있는 귀족들은 그들끼리의 결혼을 통해 문벌(文閥)사회를 형성했습니다. 늘어난 귀족층은 자신들의 장례 제도에도 새로운 질서를 그대로 반영했던 것입니다. 복희여와도를 비롯한 장의용품은 급격히 늘어난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미리 일정한 규격에 따라 대량 제작되어 장의사에 구비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많은 화가들이 저본을 바탕으로 저마다의 개성을 살려 비슷한 그림들을 그려냈으며, 때로는 매체를 뛰어넘어 복희여와도의 채색과 문양을 그릇의 장식에 적용하기도 했습니다.

죽은 자의 재생과 풍요를 기원하는 투루판 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복희여와도는 지역적 변용의 사례임과 동시에 그 자체가 7세기 투루판 지역의 장례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로서의 의미를 지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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