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창, 〈어‧거‧주〉, 1929년, 종이에 먹, 149.6×61.9cm,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회 기증, 증7014
〈어‧거‧주〉는 3‧1운동에 참여한 애국지사이자 근대 한국의 대표 서예가인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의 1929년 작품입니다. 오세창은 화면 가운데에 물고기[魚]·수레[車]·배[舟]를 의미하는 세 글자를 상형문자로 쓰고, 그 옆에 글자들의 뜻을 작은 글씨로 적었습니다. 글의 마지막 부분에는 오세창의 인장 ‘수양(首陽)’, ‘위로고흥(葦老高興)’, ‘와전산방(瓦全山房)’이 찍혀 있습니다. 언뜻 보면 그림 같고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어‧거‧주〉에는 사실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오세창, 민족의 어른이 되다
오세창은 1864년(고종1) 역관(譯官) 오경석(吳慶錫, 1831~1879)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가업을 이어받아 1879년(고종16) 역과(譯科)에 급제했고 중국어 역관으로 활동했습니다. 또 1886년(고종23) 박문국(博文局) 주사(主事)로 근대 신문 『한성주보(漢城周報)』의 발간에 참여했고, 갑오개혁 이후 관직에서 물러난 뒤로는 언론인으로서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오세창은 1910년 국권을 강제로 빼앗겼을 때 일제가 내린 작위와 은사금을 받지 않았고, 1919년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해 조선의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된 오세창은 2년 8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며, 이후 작품 활동에 전념한 채 일제의 정책에 협력하지 않았습니다. 오세창은 광복 이후 3·1운동의 상징적 인물이자 민족의 어른으로 존경받았으며, 한국전쟁 중이던 1953년 피난지 대구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오세창에게 건국훈장 복장(대통령장)을 추서했습니다.
위창 오세창, 독립기념관 사진 제공
오세창의 예술 활동과 〈어‧거‧주〉
오세창은 1921년 출옥 후 전서(篆書)와 상형고문(象形古文)을 바탕으로 여러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또 고서화 정리에도 힘써 1928년 한국 최초의 서화가 사전인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을 발간하는 등 예술 활동에 전념했습니다. 오세창은 1929년 10월 서화협회가 주최한 제9회 서화협회전(이하 ‘협전’)에 〈어‧거‧주〉를 출품했는데 화가 심영섭(沈英燮, ?~?)은 오세창의 작품을 다음과 같이 비평했습니다.
“오세창 씨의 〈어·거·주〉와 같은 작품은 나의 많은 흥미를 끌었다. 참으로 상형문자의 격식으로 저만큼 천연의 기운을 나타내기는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어·거·주’라는 뜻을 몰라도 좋다. 오직 형태에 나타난 형태 이외에 웅담한 골기를 찾아보면 좋다.” - 「제9회 협전평」(제4회), 『동아일보』, 1929년 11월 2일 4면 2단
심영섭이 칭찬한 협전의 〈어‧거‧주〉는 현재 행방을 알 수 없으나, 국립중앙박물관에 거의 같은 시기에 제작한 〈어‧거‧주〉가 남아 있어 오세창의 필치(筆致)와 작품 맥락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오세창, 『근역서화징』, 1928년, 종이에 활자 인쇄, 국립중앙박물관 도서관 소장
〈어‧거‧주〉에 담긴 의미
오세창이 행서로 쓴 〈어‧거‧주〉의 전거(典據)는 중국의 옛 책인 『전국책(戰國策)』에 실려 있습니다. ‘어(물고기)’는 비목어(比目魚)라는 물고기도 힘을 합쳐 움직인다는 뜻이고, ‘거(수레)’는 수레가 밀리지 않으면 힘을 더해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며, ‘주(배)’는 서로 모르는 사람도 배를 타고 가다가 큰물을 만나면 서로 돕는다는 내용입니다. 세 이야기는 비유는 다르지만 작은 세력이라도 힘을 합치면 큰 위기를 극복해나갈 수 있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오세창이 어떤 이유로 〈어‧거‧주〉를 제작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쓰다 옥고를 치른 애국지사였다는 점과 〈어‧거‧주〉를 제작한 1929년이 3‧1운동 10주년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우리 민족의 갈등과 분열을 부추겼는데 오세창도 이러한 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일제의 감시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지 못했지만, 〈어‧거‧주〉라는 작품으로 우리 민족에게 “작은 힘이라도 합쳐야 독립의 염원을 이룰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요? 오세창은 이후 ‘어‧거‧주’를 새긴 인장을 만들고 작품에 인문(印文)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오세창, ‘어·거·주’ 인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