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모름, <성좌도(星座圖)>, 조선 19세기 초, 187.1cm×485.0cm, 보물, 덕수1218
‘신구법천문도(新舊法天文圖)’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이 <성좌도>는 하늘의 별자리를 묘사한 천문도 병풍입니다. 작품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동양에서 예부터 사용해 온 전통 천문도와 서양에서 새롭게 들어온 신식 천문도가 함께 그려져 있습니다. 조선 초기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에 비해 새로운 지식을 담고 있어서 서양 천문도를 ‘신법천문도’라 부릅니다.
<천상열차분야지도>, 조선 후기, 140.2cm×88.8cm, 동원3607
한국의 옛 그림이나 책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내용이 진행됩니다. 이 병풍의 그림도 오른쪽 상단에서 시작하여 왼쪽 하단에서 끝납니다. 가장 오른쪽에는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한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를 그렸습니다. 조선시대 ’천상열차분야지도‘는 크게 세 가지 판본이 존재합니다. (태조 석각본, 선조 목판본, 숙종 복각본과 그 탁본)이 천문도에 그려진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숙종대에 돌에 다시 새긴 복각본 또는 그 탁본을 기초로 교정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천상열차분야지도’ 옆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본래 서운관(書雲觀)이 소장하고 있던 각본이다. 우리 태조조에 평양에 있는 옛 판본을 바친 것이 있었다. 임금(태조)께서 이를 보물처럼 중요하게 여겨 관상감(觀象監)에게 명하여 돌에 새기게 하셨다.”
천문도 위쪽에는 ‘황도남북양총성도(黃道南北兩總星圖)’에 대한 도설이 기록되어 있는데, 천문도에 사용된 좌표계와 읽는 방법, 별의 밝기, 수많은 별이 모여 은하수를 이루었다는 점, 천체 망원경으로 관측한 해, 달, 행성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글의 맨 끝에는 “옹정원년세차계묘(雍正元年歲次癸卯)에 극서(極西)에서 온 대진현(戴進賢)이 방법을 세우고 리백명(利白明)이 새겼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1723년 서쪽 끝(유럽)에서 온 독일 선교사 이그나티우스 쾨글러(Ignatius Kögler, 1680∼1746)가 작성하고 페르난도 모기(리백명, Fernando Moggi, 1694~1761)가 인쇄를 했다는 뜻입니다.
<성좌도>의 ‘황도북성도’(오른쪽), ‘황도남성도’(왼쪽)
‘천상열차분야지도’ 왼쪽에는 원형으로 된 두 개의 천문도가 있는데, 동양의 전통적인 방법과는 다르게 황도(黃道, 지구가 태양을 도는 큰 궤도)를 중심으로 북쪽 지도인 ‘황도북성도’, 남쪽 지도인 ‘황도남성도’를 표현했습니다. 이 지도는 황도 좌표계의 평사도법(stereographic projection)으로 그린 점이 특징입니다.
가장 왼쪽에는 태양, 달, 진성(鎭星, 토성), 세성(歲星, 목성), 형혹(熒惑, 화성), 태백(太白, 금성), 진성(辰星, 수성)이 그려져 있습니다. 천체가 배열된 순서의 의미는 명확하지 않지만, 동양의 오행설을 따르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각 천체에는 망원경으로 보았을 때의 특징을 묘사했습니다.
<성좌도>에 표현된 태양
이 천문도는 중국에 들어와 있던 서양 신부인 아담 샬(Adam Schall, 1591~1666)과 쾨글러가 만든 천문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보물로 지정된 <신구법천문도>(국립민속박물관 소장)와는 거의 같은 형태의 천문도로 판단됩니다. 18세기 초 관상감에서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천문도와 동일한 천문도가 현재 영국과 일본에도 남아 있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 서양과 한국의 천문 지식을 함께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천문도 병풍은 높은 사료적 가치를 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