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팔찌는 주로 무덤에서 출토되는데, 무덤에 묻힌 사람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에 따라 팔찌의 재질이나 수량이 달라집니다. 왕족 무덤에서는 금, 금도금, 은으로 만든 팔찌가 같이 나올 때가 많고, 그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의 무덤에서는 은 또는 구리로 만든 팔찌가 적지 않게 확인됩니다. 특히 많은 수의 팔찌가 확인된 곳은 신라의 왕경(王京)이었던 ‘경주’로, 5~6세기 경주 곳곳에 만들어진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墓]에서 수십 점의 팔찌가 출토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출토된 다양한 부장품을 통해 무덤에 묻힌 사람의 신분과 위계가 각기 달랐다는 데 대부분 동의합니다. 국립박물관에서 찬란한 빛을 뽐내고 있는 금관과 금제 허리띠, 금귀걸이와 금팔찌, 금반지 등은 모두 마립간(임금)과 부인, 자식 등 가족의 무덤에서 출토되었습니다. 황남대총과 금관총, 서봉총, 천마총, 금령총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무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가장 화려한 신라 목걸이, 그리고 ‘금팔찌’
경주 노서리 215번지 무덤 출토 금제품 일괄, 신라 6세기, 금목걸이 길이 30.3㎝, 보물, 본관13613ㆍ13614, 신수1286ㆍ1287ㆍ1291
하지만 금관이 출토되지 않은 무덤에서 금팔찌가 확인된 예도 있습니다. 경주 노서리 215번지 무덤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 우연히 발견되어 긴급 조사된 무덤 안에서는 화려한 금목걸이와 금귀걸이, 금팔찌, 은팔찌, 은반지 등이 토기 수십 점과 함께 출토되었습니다.
대부분 목걸이는 옥이나 유리, 수정 등으로 이루어지지만, 여기에서 출토된 목걸이는 금제 구슬 77점과 비췻빛 곱은옥 1점을 연결해 만든 것으로 가장 화려한 신라 목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금목걸이 외에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이 바로 금팔찌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확인된 삼국시대 팔찌 가운데 앞ㆍ뒷면을 용으로 장식한 사례는 단 세 건뿐입니다.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비의 은팔찌를 비롯해 경주 황오동 52호 무덤 출토 금팔찌, 그리고 경주 노서동 금팔찌가 그렇습니다. 은으로 만든 무령왕릉 출토품을 제외한다면, 경주에서만 용으로 장식한 금팔찌가 두 건이나 확인된 셈입니다.
경주 노서리 215번지 무덤에서는 금팔찌 2점과 은팔찌 2점, 총 4점의 팔찌가 출토되었습니다. 그중 용으로 장식한 금팔찌 한 쌍은 두께가 81㎜ 내외로 신라 팔찌 중에서 가장 두껍습니다. 일자형 봉을 만들어 둥글게 구부린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무늬가 새겨진 팔찌 형태의 거푸집을 만들고 틀에서 찍어낸 주조(鑄造) 제품입니다.
경주 노서동 금팔찌와 용무늬 세부, 신라 6세기, 지름 8.1㎝, 보물, 신수1291
팔찌의 단면은 편평한 타원형이며, 테두리 바깥쪽을 따라 59개의 돌기가 둘려 있습니다. 이처럼 돌기무늬로 장식한 팔찌는 5세기 말~6세기 전반에 크게 유행합니다. 돌기 가운데에 유리나 보석을 박아 장식할 수 있도록 작은 구멍이 움푹 파인 형태도 있으나, 경주 노서동 금팔찌에는 구멍은 없고 판판한 타원형 돌기만 있습니다. 앞ㆍ뒷면에는 서로 뒤엉킨 네 마리의 용이 역동적인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네 마리 용은 모두 서로 다른 용의 꼬리를 물려는 듯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용의 이빨과 눈, 몸의 비늘까지 세밀하게 표현된 이 금팔찌는 당시 신라의 정교한 황금 세공 기술을 엿볼 수 있는 걸작입니다.
고구려, 백제와 달랐던 신라의 상장례(喪葬禮)
오늘날 누군가 세상을 떠나면 시신을 씻기고 곱게 꾸민 뒤 수의(壽衣)를 입히는 ‘염습(殮襲)’ 과정을 반드시 거칩니다. 하지만 삼국시대에는 염습이 일반적이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삼국의 장례 문화를 기록한 중국 역사책을 보면, 신라에서만 관을 사용하여 ‘염(殮)’을 했다고 적고 있기 때문입니다.
死有棺殮, 葬送起墳陵. 王及父母妻子喪, 居服一年.
(사람이 죽으면) 관에 넣고 염을 하였으며, 장례를 치른 후 그 위에 봉분을 쌓았다. 왕과 부모, 처자의 상을 치를 때에는 상복을 1년간 입는다. - 『북사(北史)』 권94 「열전」 제82 <신라>
고구려에서는 살아 있는 동안 수의를 미리 준비해놓았으며, 사람이 죽으면 처음에는 눈물을 흘리며 곡을 하지만 장례를 치를 때에는 북을 치고 춤추고 연주하면서 죽은 이를 떠나보냈다고 합니다. 또한 집 안에 빈소를 만들어 시신을 3년 동안 모셔두었다가 좋은 날을 택해 장사를 지냈습니다. 시신을 묻고 난 뒤에는 죽은 이가 살아 있을 때 썼던 옷과 노리개, 수레와 말 등을 무덤 곁에 두었는데, 장례에 모인 사람들이 앞다투어 이를 가져갔다고 합니다. 부모와 남편은 3년, 형제는 3개월 동안 상복을 입었습니다. 백제 또한 고구려와 비슷했는데, 부모와 남편 이외 친족의 경우에만 장례를 마치고 바로 상복을 벗었다고 합니다. 이를 보면 신라는 확실히 고구려, 백제와 상장례(喪葬禮, 장사 지내는 일과 상중에 하는 모든 예법)의 절차와 분위기가 매우 달랐습니다.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을 보면 하나같이 시신의 몸에 걸쳤던 여러 장신구(관, 목걸이, 팔찌, 반지, 허리띠 등)와 사람 뼈의 위치를 통해 무덤에 묻힌 사람에 대한 많은 정보(성별, 신체 크기, 신분 등)를 얻을 수 있습니다. 발굴을 통한 고고학적 결과가 문헌에 적혀 있는 신라의 염습 문화를 증명한 셈입니다. 이를 백제 석촌동 고분군의 화장한 사람 뼈와 유물을 한데 섞어 매장한 사례, 공주 단지리 유적 횡혈묘(橫穴墓)의 먼저 안치된 사람 뼈를 한쪽에 밀어놓고 추가장을 실시한 사례 등과 비교하면, 신라인들이 고구려인, 백제인과 달리 죽은 이의 몸을 온전하게 보전하기 위해 노력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염을 하고, 관 뚜껑을 닫아 가족을 놓아주다
경주 노서리 215번지 무덤에 묻힌 누군가도 그 가족들이 정성스럽게 염을 해서 장례를 치렀을 것입니다. 화려한 금목걸이와 금귀걸이를 보면, 무덤에 묻힌 이는 살아 있는 동안 상당한 재력과 지위를 누렸으며, 주변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인물로 보입니다. 보통 고리가 굵은 귀걸이[太鐶耳飾]는 여성이 사용했다고 보는데, 그렇다면 이 무덤의 주인공도 누군가의 어머니 또는 누군가의 아내나 딸이었겠지요.
가족들은 슬픈 마음을 하나하나 눌러 담아 껴묻거리를 만들고, 염을 하는 등 정성스럽게 장례를 준비했을 것입니다. 양팔의 팔찌는 누가 채워줬을까요? 이미 차갑게 식은 가족의 팔을 부여잡고 흐르는 눈물을 참아가며 팔찌를 하나씩 하나씩 채웠겠죠? 마지막으로 열 손가락에 반지까지 다 끼운 뒤 그 손을 한참 부여잡고 놓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닫히는 관 뚜껑을 바라보며, 결국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냈을 것입니다. 흙을 덮어 봉분까지 만들고 나면, 다시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가족을 그리는 이들의 슬픔으로 울음바다가 되었겠지요. 그렇게 상복을 입는 1년 동안, 혹은 그 이후로도 가족들은 계속 슬픔을 곱씹지 않았을까요?
이처럼 천수백 년 전에도 우리 조상 중 누군가는 지금 우리와 똑같이 가족을 잃는 슬픔을 겪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금팔찌는 이렇듯 오래전 조상들의 삶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자! 여러분, 만약 박물관에서 이 금팔찌를 다시 본다면, 어떤 느낌이 들 것 같으세요? 화려함에 대한 감탄? 재력과 지위에 대한 부러움? 그것도 좋지만, 당시 가족들이 죽은 이에게 팔찌를 채우며 느꼈을 슬픔도 한번 생각해보시면 어떨까요? 그러면 이 금팔찌가 아마 새롭게 보이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