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황粧䌙이란 책의 본문과 표지를 묶어서 장식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왕에게 올리는 어람용 의궤와 실무자들이 참고하기 위해 만든 분상용 의궤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바로 장황에 있습니다. 어람용 의궤는 초록색의 고급 비단으로 표지를 만들었습니다. 별도로 흰 비단을 마련해서 제목은 쓴 후 표지에 붙였고요. 표지와 내지는 겹쳐서 구멍을 뚫은 후 겉에 반짝이는 놋쇠 판을 대고 못을 박아 고정하였습니다. 놋쇠 판은 변철이라고 하고, 못은 박철이라고 합니다. 박철은 다시 국화 꽃잎 모양의 장식을 덧대어 꾸몄습니다. 변철 중앙에는 둥근 고리인 원환도 달았네요. 일반적인 책에서는 볼 수 없는 고급스러운 마감입니다.
분상용 의궤는 행사 진행을 담당하는 관원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여러 관청에 나누어 준 책입니다. 중요한 국가 행사의 기록이기 때문에 종이로 만들어 실로 묶는 보통의 책보다 격을 높였지만, 어람용 의궤에 비하면 장식이 생략되어 검소하고 실용적인 모습입니다. 표지는 붉은 색으로 물들인 삼베로 만들었고요, 제목은 표지에 먹으로 썼습니다. 변철과 박철로 엮은 것은 동일하지만 놋쇠가 아니라 그냥 쇠로 만들어서 투박한 모습입니다. 국화동 장식도 없네요.
어람용 의궤는 내지에서도 기품이 느껴집니다. 두껍고 표면이 매끈한 고급 종이인 초주지를 사용했고요, 왕이 보는 책에만 사용하는 붉은 안료로 테두리를 둘렀습니다. 반듯한 해서체로 정갈하게 썼네요. 글자를 써내려가다가도 왕이나 왕실과 관련된 단어가 나오면 줄을 바꾼 후 한두 칸을 올려서 썼습니다. 존귀한 존재를 가리키는 단어임을 표시하는 방법입니다.
분상용 의궤는 어람용 의궤만큼 정성을 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종이는 일반적인 닥나무 한지인 저주지를 썼고요, 글자를 쓸 자리를 표시하는 테두리는 나무틀에 먹을 바른 후 한 번에 찍었습니다. 빠르게 많은 양의 내지를 만들 때 쓰는 일반적인 방법입니다. 글씨는 어떤가요? 평소에 쓰는 글씨체로 빠르게 적은 듯하지요? 실무자들이 보는 책이기 때문에 정성을 들여 아름답게 쓰기보다는 내용 전달에 중점을 두고 쓱쓱 써내려 간 모습입니다.
2011년 프랑스로부터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는 총 297책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있는 이 전시실에 297책이 모두 와있습니다. 왕을 위해 만든 귀한 책 어람용 의궤. 이렇게 한 자리에 모아보니 규모가 대단하네요! 하지만 이것은 조선왕조 내내 만들었던 의궤 중 지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조선 후기 인조 대부터 철종 대 사이에 만든 의궤 중에서도 어람용 의궤 일부만 모은 것이기 때문이죠. 어람용과 분상용을 다 합쳐서 지금 국내에 전하는 의궤는 약 4,000책 정도라고 합니다. 외규장각 의궤 297책만으로도 이만큼이나 많은데, 4,000책을 다 모은다면 끝이 보이지도 않겠어요. 조선이 500년 역사 동안 계속해서 이렇게 많은 의궤를 만들었던 이유가 궁금해지는군요. 의궤가 어떤 책인지, 어떤 내용이 담겨있는지 지금부터 같이 살펴볼까요?
왕의 무덤인 왕릉을 옮기는 것은 새로 장례를 치르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비용도 많이 드는 일입니다. 이에 대한 기록도 양이 매우 많았겠죠? 1846년 헌종이 아버지 익종의 능 수릉을 옮긴 후 만든 의궤는 무려 9책이나 됩니다. 이전 묘소에서 관을 꺼내 새로운 묘소로 옮기는 과정을 기록한 익종수릉천봉도감의궤가 2책, 새로운 곳에 능을 조성한 내용을 기록한 익종수릉천봉산릉도감의궤가 7책입니다. 수릉의 이전은 이렇게 방대한 양의 기록을 남겼지만, 헌종실록에는 단 3줄의 기록만 등장합니다. “널리 여러 사람의 의견을 물어 결정하도록 했다.”라거나 “이전하는 절차를 빨리 진행하라고 명했다.”라는 매우 간략한 내용입니다. 실록 같은 편년기사는 왕이 직접 관계하였거나 특별한 중요성이 있는 사안만을 추려서 재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능을 옮기는 전체 과정을 일일이 포함시킬 수 없었던 것이죠. 반면에 의궤에는 공역 전반의 절차와 세부 진행 모습, 이와 관련한 여러 사람들의 논의 내용까지 모두 수록되어 있어서 조선시대에 왕릉을 옮길 때는 어떻게 했을지 궁금하다면 실록보다는 의궤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하나 상세하게 다 남기는 조선의 기록정신이 여실히 드러나는군요.
지금의 경희궁 전경을 그린 초본입니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12장의 종이를 이어 붙여서 경희궁의 여러 전각과 주변 언덕의 자연경관을 전부 담았네요. ‘경희궁’이라는 이름은 영조 때에 붙인 것이고, 그 전에는 ‘경덕궁’이라고 불렸습니다. 한양 동쪽에 있는 창덕궁‧창경궁을 ‘동궐’이라고 부른 것과 짝해서 ‘서궐’이라고도 했죠. 1829년 경희궁에 큰 불이 나서 이듬해에 새로 지었는데, 이때의 기록이 서궐영건도감의궤입니다. 이 의궤에 실린 전각 그림과 <서궐도안>을 비교해보면 건물 배치나 구도가 약간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서궐도안>은 경희궁에 불이 나기 전에 그렸나 봅니다. 전각마다 높이 솟은 지붕, 총총히 쌓인 돌계단과 쭉쭉 뻗은 담장까지. 곳곳에 자리잡은 키 큰 나무까지도 어느 하나 대충 그린 것이 없습니다. 드넓은 궁궐 전체를 정말 섬세하고 정밀하게 묘사했네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경희궁은 심하게 훼손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지금 경희궁의 전체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는 <서궐도안>이 유일합니다.
조선의 17대 왕 효종孝宗(재위 1649~1659)의 장례식 과정을 기록한 『효종국장도감의궤孝宗國葬都監儀軌』에 실린 반차도班次圖입니다. 효종의 관을 실은 상여喪輿가 경기도 여주에 있는 묘소 영릉寧陵까지 이동하는 행렬을 그린 것입니다. 효종은 청나라가 조선을 침입하였던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 때 왕자였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강제로 청나라로 가서 8년이나 살았습니다. 왕이 된 효종은 굴욕을 씻기 위해 청나라를 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1659년 5월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묘소로 가는 장례 행렬은 10월 28일 새벽 동이 트기 전에 창덕궁을 출발하였습니다. 상복을 입은 관리들을 시작으로 군인과 내시, 악대 등 6천여 명이 왕의 행차를 알리는 각종 기물과 효종의 관, 다양한 장례 물품들을 들거나 가마에 싣고 줄 맞춰 천천히 나아가고 있습니다.
통통한 네 다리에 앙증맞은 뿔이 있는 이것은 무엇일까요? 조선 왕실에서 제사를 지낼 때 술을 담아 두던 술동이입니다. 소 모양 술동이는 ‘희준’, 코끼리 모양 술동이는 ‘상준’이라고 합니다. 이 상준과 희준은 배에 ‘문희묘文禧廟’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문효세자를 제사지내기 위해 만든 사당 ‘문희묘’에서 사용한 것입니다. 문효세자는 정조의 첫 번째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이 태어나자 너무 기뻤던 정조는 장차 나라를 이끌 성군이 되기를 바라면서 곧바로 세자로 책봉하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자는 겨우 다섯 살에 홍역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엄숙한 제사에 쓰는 그릇인데도 익살스러운 표정에 쭈글쭈글한 주름까지 진짜 소와 코끼리를 쏙 빼닮은 모습입니다.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어린 세자가 자신의 제사 때 희준과 상준을 보며 즐거워하길 바란 정조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뭉클해지네요.
왕세자는 장차 왕위를 계승하게 될 후계자입니다. ‘나라의 근본’이라는 의미에서 ‘국본國本’이라고도 합니다. 왕세자를 미리 정하지 않으면 왕이 갑자기 돌아가시거나 변고가 생겼을 때 왕위가 비는 비상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죠. 그래서 모든 왕조 국가에서 후계자를 정하는 일은 왕실과 국가를 안정적으로 이어나가기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었습니다. 조선왕조도 마찬가지였죠. 조선시대에 왕세자를 정하는 의례를 ‘책례’라고 했습니다. 궁궐 중앙의 핵심 전각인 정전에서 성대하면서도 장중하게 거행했죠. 왕통을 계승할 사람임을 만천하에 알리는 의식입니다. 국본을 세우는 중요한 일인 만큼 책례가 끝나면 기록도 철저하게 남겼습니다. 책례 준비 과정에서의 논의 내용, 업무분장에서부터 각 기물의 배치와 의례가 진행되는 동안의 왕세자 동선까지. 의례 때에는 왕세자임을 증명하는 상징물로 옥으로 만든 도장인 옥인, 왕세자 책봉의 글귀를 적은 죽책과 교명을 하사합니다. 이 상징물에 대한 내용도 의궤에 적혀있죠. 크기, 재질, 무게는 물론 어떤 모습인지 알기 쉽도록 그림도 있습니다. 그 꼼꼼함과 상세함에 감탄이 절로 나오네요!
사대부 출신 문인화가 조영석趙榮祏이 자신의 형 조영복(1672~1728)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입니다. 영조가 이 그림을 보고 실물과 너무 흡사하다며 조영석의 솜씨를 칭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조는 1748년 숙종의 어진을 그릴 때 조영석을 불러 그림을 맡기려고 했습니다. 왕의 초상을 그리는 것은 더없이 중요한 일이었을 텐데도 조영석은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예와 명분으로 나라에 이바지하는 선비이기 때문에 그림 그리는 기예技藝로 왕을 섬길 수는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들은 영조는 조영석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질책하긴 했지만 벌을 내리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조영석의 꼿꼿한 사대부의 절개를 인정했기 때문이겠죠?
조선 역사를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던 왕이 누군지 아시나요? 조선 제21대 왕 영조입니다. 그런데 즉위 초반에는 이복형 경종을 독살하고 왕이 되었다는 소문이 크게 퍼지고 1728년에 반란까지 일어나 왕권이 위협받기도 했습니다. 영조는 병조판서 오명항에게 진압을 명했고, 오명항이 이끈 군대는 한 달도 되지 않아 반란군을 완전히 진압하였습니다. 영조가 오명항을 공신으로 책봉한 것은 당연한 일이겠죠? 직접 공을 세운 사람 15명을 분무공신으로 선정했는데, 그 중에 오명항이 단독 1등급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지금 보시는 작품은 오명항이 관복을 갖춰 입은 모습을 그린 초상화입니다. 점잖고 기품 있는 사대부 관료의 모습이네요. 조선시대에는 공신에 책봉되면 여러 가지 예우를 해주는데, 그 중의 하나가 초상화를 그려서 내려주는 것이었죠. 그만큼 초상화는 아무나, 원한다고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공신에게 왕명으로 그려주는 초상화라니 얼마나 영광스러웠을까요? 자자손손 가보로 물려주기에 충분합니다.
<대동여지도>로 유명한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보다 앞서서 <동여도>라는 전국지도를 만들었는데요, 그 중 한양의 전체 모습을 그린 지도입니다. 중앙을 둥그렇게 에워싼 성벽이 보이나요? 이 성벽 안쪽이 조선시대의 도성이죠. 이제 도성을 벗어나 외곽으로 나가볼까요? 빨간 색으로 표시된 길을 따라서 오른쪽으로 성문을 빠져나가 강을 건너면 ‘선농단’에 이릅니다. 지금의 동대문구 제기동이네요. 조선시대에는 왕이 직접 농사짓는 시범을 보인 친경의례가 있었는데요, 여기 선농단에서 농사의 신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게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림으로써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제사를 지내는 낮은 단과 성스러운 구역임을 표시하는 홍살문이 복원되어 있습니다. 제사를 마치면 왕은 선농단 오른쪽에 ‘동적전’이라고 표시된 곳으로 갔습니다. ‘적전’은 왕이 직접 농사를 짓는 땅을 말합니다. 이곳에서 왕은 5번 쟁기질을 하는 의식을 치렀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 흙 밭에서 쟁기질을 했다니! 이 모습을 지켜본 백성들은 모두 왕의 열렬한 팬이 되지 않았을까요?
모든 행사가 끝난 후 순조는 규장각奎章閣에 명하여 의궤를 편찬하게 했습니다. 총 3부를 만들었는데, 지금은 어람용 1부가 전합니다. 행사 준비와 진행 과정, 사용한 물품과 비용을 꼼꼼히 적었고, 49면이나 되는 도설圖說은 섬세한 묘사와 선명한 색감이 돋보입니다. 1809년 혜경궁에게 올린 진표리와 진찬 두 행사를 함께 기록한 유일한 의궤입니다. 『기사진표리진찬의궤己巳進表裏進饌儀軌』는 본래 외규장각에 봉안되어 있었으나, 병인양요丙寅洋擾(1866년) 때 프랑스로 건너간 후 1891년 영국국립도서관이 파리에서 구입하여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습니다. 지금 전시된 이 의궤는 이번 특별전을 위해 영국국립도서관의 협조를 받아 국립중앙박물관이 복원 제작하였습니다.
진표리 장면을 그린 도설 <진표리도進表裏圖>에서 혜경궁의 자리는 전각 안에 마련되었습니다. 그 뒤에 모란꽃이 가득한 병풍이 보입니다. 8폭 전체를 하나의 화폭으로 삼아 뻗어나간 가지마다 커다란 꽃송이가 만개한 모습을 그렸습니다. 모란은 부귀와 영화의 상징입니다. 조선 왕실은 상서로움과 복이 가득하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다양한 의례용품에 모란무늬를 장식했습니다. 특히 모란 병풍은 화려함이 두드러지는 왕실 경사에 빠짐없이 등장했습니다. 혜경궁의 자리에 펼친 모란도 병풍으로 관례冠禮 60주년을 축하하는 경사스러운 날의 의미가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
흥겨운 잔치에 음악이 빠질 수 없겠죠? 혜경궁의 관례冠禮 60주년 축하 잔치 때에는 헌가軒架와 등가登歌라고 하는 두 그룹의 악대가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등가는 가야금, 거문고, 아쟁 같은 현악기絃樂器를 위주로 하고, 헌가는 피리, 대금, 퉁소 같은 죽관악기竹管樂器가 중심입니다. 특히 헌가 중에는 화려하고 거대한 악기들이 많은데요, 그 중의 하나라 지금 보시는 건고建鼓입니다. 연주를 시작할 때 건고를 세 번 반복해서 치면 곧 합주가 시작되었다고 하네요. 건고는 국악기 중 가장 화려하고 큰 북입니다. 호랑이 네 마리가 사방으로 머리를 뻗은 모습의 받침대에 길고 튼튼한 막대를 세우고 북을 꽂았습니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는 호랑이 표정이 재미있네요. 북 위에는 네모 상자 모양의 덮개를 2층으로 쌓고, 네 모퉁이에서 쭉 뻗어 나온 용이 아래로 늘어진 아름다운 술 장식을 입에 물고 있습니다. 꼭대기에는 날개를 활짝 펼치고 막 날아오르려는 모습의 흰 새 한 마리를 얹었고요. 정말 화려하고 듬직하지 않나요? 그 소리는 어떨지 궁금해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