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화강암, 국립중앙박물관 어느 수집가가 여러분을 집으로 초대합니다. 이 집은 다양한 수집품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수집품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 그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들려드리겠습니다. 집으로 향하는 길목에 <석인상>이 먼저 반겨줍니다. 어딘지 정겨운 모습입니다. 길쭉하게 늘어진 귓불을 보면 부처님 같기도 한데, 퉁방울눈에 주먹코는 아무래도 장승을 닮았습니다. 마을 어귀에서 잡귀를 쫒아주던 고마운 석물이었습니다.
권진규(1922-1973), 1967년, 테라코타에 채색, 국립현대미술관 왼쪽으로 돌면 저 앞에 궁궐 대문처럼 위가 둥근 문이 보입니다. 우리나라 근현대 조각의 선구자 권진규가 점토로 빚어 만든 작품입니다. 닫힌 문 뒤에 펼쳐질 세계를 상상해보니 어딘지 두근거리네요. 권진규는 점토를 참 좋아했습니다. 자유롭게 주무르기 좋고, 불에 구울 때 우연한 변화도 기대해볼 수 있는데다가, 작가가 끝손질까지 맡는 재료이기 때문입니다. 점토로 만들어 영원히 존재할 이 <문>을 지나 수집가의 집으로, 그리고 수집품이 만들어진 과거의 시간으로 들어갑니다.
임옥상(1950년생), 1991년, 종이부조에 채색, 국립현대미술관 오른쪽으로 들어서니 기와집이 있는 종이부조가 보입니다. 작품 제목은 <김씨연대기>입니다. 가만히 보면 기와집 아래에 거인처럼 큰 노부부가 누워있습니다. 황토 땅 위에 긁어 그린 것처럼 윤곽만 보입니다. 임옥상은 현대사의 굴곡 속에서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 굳건하게 터전을 일구고 살아간 우리 윗세대의 삶을 이야기해주지요. 우리 눈앞의 오늘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선조의 땀과 희생 위에 세워진 것이라는 사실을 곱씹게 됩니다.
이종우(1899-1981), 1920년,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화가는 자신의 아버지를 위엄이 넘치는 모습으로 표현했습니다.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기고 콧수염을 길렀으며, 양복과 넥타이를 갖추어 입은 모습에서 높은 사회적 지위와 재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날카로운 눈매와 굳게 다문 입에서 근엄하고 엄격한 성품이 느껴집니다. 이종우는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화가가 되었고, 1925년 한국 화가 최초로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장욱진(1918-1990), 1979년,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수집가의 집으로 들어서면 가족의 사랑을 표현한 그림과 조각들이 여러분을 맞이합니다. 먼저 장욱진이 그린 <가족>을 보세요. 그림에는 허물없이 지내는 행복한 가족이 등장합니다. 동화처럼 순진무구한 모습입니다. 하늘에는 해와 달이 떠있고, 땅에는 원두막이 서있습니다. 그림 한가운데에 둥근 보금자리가 떠올라 있습니다. 세 가족과 강아지를 우주가 보듬어주는 것 같습니다. 벌거벗은 모습에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움이 느껴집니다. 장욱진은 “나는 심플하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합니다. 화가의 소탈한 성품이 그대로 그림이 된 것 같습니다.
권진규(1922-1973), 1960년대, 테라코타에 채색, 국립현대미술관 온 세상 풍파에서 아이를 지켜내겠다는 굳은 의지를 드러내는 듯한 어머니와 아이를 조각했습니다. 여인의 시선과 입매, 그리고 아이를 두 다리로 받치고 탄탄한 양팔로 감싸 안은 자세에서 긴장감이 전해집니다. 엄마의 든든한 보호를 받고 있는 아기는 평온하기만 합니다. 권진규 특유의 사실성과 정신성이 잘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박수근(1914-1965), 1962년, 패널에 유채, 박수근미술관 다음으로는 박수근이 그린 <아기 업은 소녀>를 감상하세요. 짧은 치마에 저고리를 입은 소녀가 아기를 업고 어르고 있습니다. 엄마 아빠가 모두 일하는 한낮에는 아기 돌보기가 소녀의 몫이었나 봅니다. 옆집 친구는 학교에 간다는데, 서운한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요. 그래도 소녀는 지긋이 미소 짓고 있습니다. 떼쟁이 막냇동생이지만 내 가족이니까요. 박수근은 캔버스에 채도가 낮은 물감을 겹겹이 발라서 독특한 질감을 완성했습니다. 골목길 바닥 같이 거칠면서도 어딘지 그리운 느낌이 듭니다. 박수근은 1950년대 서울의 일상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사람들은 전쟁으로 상처를 입었지만 결코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폭격으로 무너진 잔해를 치우고, 가족이 굶지 않도록 일거리를 찾아 뚜벅뚜벅 살아내었습니다. 박수근은 이런 보통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림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이중섭(1916-1956), 1954년, 종이에 유채, 연필, 크레용, 이중섭미술관 오른쪽 벽에 작은 그림이 걸려있습니다. 이중섭이 그린 <현해탄>입니다. 그림 가운데 검푸른 파도가 ‘현해탄’이라고 불렀던 대한해협입니다. 그 파도 너머 엄마와 두 아이가 어서 오라고 손짓합니다. 이중섭 자신은 배를 타고 가족에게 향하고 있네요. 얼마나 반가운지, 화가의 얼굴은 거꾸로 돌아가 있습니다. <현해탄>은 소망을 그린 작품입니다. 1952년, 이중섭의 부인 마사코가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났습니다. 서울에 남은 이중섭은 종종 편지에 그림을 동봉해서 가족에게 보냈습니다.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말이지요. 이중섭은 이 그림을 부친 뒤에 가족을 다시 보지 못하고 마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결국 이루지 못한 소망이 담긴 그림이라 더 쓸쓸합니다. 글과 그림에 남은 가족의 이야기는 어떠셨나요? 오늘 우리에게도 그 진실한 마음이 잔잔하게 다가옵니다.
정약용(1762-1836), 조선 1814년, 비단에 먹, 국립중앙박물관 200년 전 조선시대 글이 위아래로 걸려있습니다. 위쪽 액자는 <정효자전>입니다. 전라도 강진 사람 정여주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이 너무나 보고 싶었습니다. 손주들을 홀로 키우는 며느리도 안타까웠지요. 마침 고을에 귀양살이 온 선비가 그렇게 글을 잘 쓴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비에게 가족 이야기를 글로 남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선비는 다산 정약용이었습니다. 가족과 떨어진 유배 생활이 벌써 10년이 지나고 있었으니, 아들을 잃은 아버지 마음이 남 일 같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효자전>은 어린 시절부터 효성스러웠던 정관일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정관일이 서른 살에 세상을 떠나자, 부친은 이렇게 울었다고 합니다. “너는 한번 죽었지만, 나는 세 가지를 잃었다. 아들을 잃고, 친구를 잃고, 스승을 잃었다.” 그 아래의 액자는 <정부인전>입니다. 홀로 남은 정관일의 부인이 두 아들을 엄하게 가르친 마음가짐이 실려 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작품 옆 모니터로 읽어보세요.
이중섭(1916-1956), 1950년대, 종이에 펜, 수채, 크레용, 국립현대미술관 인간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하는데, 이를 잘 하는 사람이 바로 화가입니다. 화가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창작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 작품 속 화가는 단칸방 벽에 수많은 작품을 붙여놓고 파이프를 문 채 누워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예술에 몰입한 화가에게는 허름한 골방도 예술의 성전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조선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이제 창이 열린 방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창으로 들어온 달빛은 둥근 항아리를 하얗게 비추는데, 그 왼쪽에 그림이 둘 걸려있습니다. 그릇 하나와 그림 두 장에 담긴 이야기가 만나 새로운 이야기가 태어납니다. 오른쪽의 백자 항아리는 참 복스럽게 둥그스름합니다. 무엇이든 품어줄 것처럼 넉넉하고, 어딘지 삐뚜름하지만 여유롭습니다. 조선 사람들이 집에 두고 사용했던 항아리였지요. 화가 김환기는 이런 백자 항아리를 많이도 수집했습니다. 항아리를 한아름에 안고서 “달이 내 품에 들어왔다”고
김환기(1913-1974), 1950년대, 하드보드에 유채, 광주시립미술관 항아리 바로 왼쪽의 그림은 김환기가 1950년대에 그린 <작품>입니다. 화가는 달과 달항아리를 반추상으로 그렸습니다. 세 개의 동그라미가 만들어낸 달의 이미지가 묘한 울림을 전해줍니다. 하늘에 보름달이 뜨고, 땅 위에 달항아리가 놓이고, 바닥에 달그림자가 비치니 달이 대체 몇 개인지 모르겠네요.
김환기(1913-1974), 1968년, 종이에 유채, 광주시립미술관 가장 왼쪽에 걸린 1968년 작품은 푸르스름한 배경에 빨간색, 파란색, 검정색 점을 찍은 그림입니다. 1960년대에 뉴욕에 정착한 김환기가 더 완전한 추상 회화를 시도하면서 그린 것입니다. 하지만 그림 왼쪽 위를 가만히 보세요. 큼직한 동그라미에서 달이 연상되고, 그 주변의 점들은 수많은 별처럼 보입니다. 김환기가 그리고 싶었던 마음의 풍경은 달과 달항아리에 뿌리내리고 있었나 봅니다. 시작은 항아리였지만 그 끝은 추상 회화가 된, 김환기의 달 이야기였습니다.
작가 모름, 조선 19세기, 종이에 색, 국립중앙박물관 수집의 공간으로 어서 오세요. 귀한 물건을 수집하고 싶은 마음은 옛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책가도 병풍>에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수집하고 싶었던 물건이 잔뜩 그려져 있습니다. 벼루와 연적은 선비의 친구였고, 청동향로와 옥장식 같은 골동품도 하나쯤 가지고 싶은 물건이었습니다. 쉽게 구할 수 없는 물건들이어서, 이렇게 실감나는 그림으로 그려서 방에 펼쳐놓았나 봅니다.
조선 18-19세기, 나무와 금속, 국립중앙박물관 <책가도 병풍> 왼쪽에는 한옥 방 같은 공간에 여러 가지 목가구가 놓여 있습니다. 가구는 공간입니다. 겉모습이 아니라 그 안의 공간이 쓰임새가 있으니까요. 그 공간에 갖가지 물건을 보관했습니다. 먼저 가장 큼직한 삼층장을 살펴보세요. <삿자리 장식 삼층 장>입니다. 붉은 칠은 왕실의 품격을 상징합니다. 기둥을 삼각형 단면으로 섬세하게 깎아서, 큼직하지만 날렵한 모습입니다. 앞면을 자세히 보세요. 가늘게 쪼갠 대오리로 삿자리무늬를 엮어 붙였습니다. 값싼 재료도 솜씨부리기에 따라 얼마든지 값진 물건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조선 19세기, 나무와 금속, 국립중앙박물관 다음으로는 가로로 넓고 두툼한 가구, <반닫이>를 보세요. 소나무 판재로 짠 직육면체 공간이 튼튼합니다. 모서리 짜임에 못까지 박아서 여간해서는 부서지지 않습니다. 무쇠 앞바탕에 자물쇠를 걸면 누구에게도 귀한 물건을 빼앗길 일 없어서 든든합니다. 이 반닫이는 전라도 나주에서 만든 가구인데, 문짝 안쪽에는 “함경도 함흥 고산면”이라는 주소가 적혀 있습니다. 무슨 사연으로 남쪽 반닫이가 동해안 북쪽까지 올라갔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사연이 궁금해집니다.
곽인식(1919-1988), 1987년, 캔버스, 종이에 수채, 국립현대미술관 흡습성이 좋은 얇은 화지和紙에 색점을 무수히 많이 칠해 물감이 번지는 효과를 내는 기법으로 활동을 한 곽인식의 작품입니다. 물감 농도에 따라 색점이 다르게 보이며, 관점에 따라 색점이 서로 밀치고 흩어집니다. 이 작품과 조선 19세기 청화백자 문양의 푸른색이 잘 어울립니다.
클로드 모네(1840-1926), 1917-1920년,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수집가의 집을 돌아보고 나오면 이제 후원에 해당하는 공간이 나타납니다. 여기에 클로드 모네의 그림 <수련이 있는 연못>이 걸려 있습니다. 정원과 연못을 사랑한 화가들이 많지만 인상주의의 창시자 모네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겁니다. 모네의 별명은 ‘빛의 사냥꾼’입니다. 야외에서 빛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풍경을 재빨리 그렸기 때문입니다. 여러 곳을 여행하며 풍경의 빛을 그렸던 모네는 결국 자신의 뒷마당이 가장 좋은 풍경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네는 파리 근교 지베르니에 집을 마련하고, 정원에 계절마다 피어나는 꽃을 심어 가꾸었습니다. 모네는 “정원은 나의 가장 아름다운 명작이다”라고 말했다고 하지요. 모네의 수련 그림은 250점이 넘습니다. 같은 대상이라도 빛에 따라 눈에 보이는 색이 달라지니까 여러 번 그린 것입니다. 작업은 결코 편하지 않았습니다. 야외에서 오래 작업한 탓인지 시력이 많이 나빠졌고, 70대에는 아내와 아들을 차례로 잃었습니다. 모네는 실의에 빠져 6년 가까이 그림을 그릴 수 없었습니다. 친지와 친구들의 위로 덕분에, 모네는 다시 붓을 들었습니다. 이 그림에서 연못의 주변 풍경은 완전히 사라지고, 오직 수련과 물 표면의 미묘한 색조만 남았습니다. 대상은 빛 속에 모호하게 녹아들어 있습니다. 훗날 추상 회화의 출현을 예고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인상주의의 거장 모네가 삶의 끝자락에서 다다른 경지를 느껴보세요.
이중섭(1916-1956), 1950년대, 종이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여기부터 수집품의 이모저모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두 점의 황소 그림에서 자연을 표현하는 두 가지 방식인 구상과 추상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중섭의 <황소>가 먼저 여러분을 맞이합니다. 그림 속 황소는 붉은 바탕 앞에서 울음을 토해내듯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커다란 눈망울에 화가의 순수한 마음이 비쳐 보이는 것 같지요. 이중섭은 피폐한 세상을 우직하게 살아내는 황소를 사랑해서 여러 차례 그렸습니다. 화가는 소의 주름과 근육의 결을 드러내듯 선을 힘차게 그었습니다. 구상 회화는 대상의 형태를 닮게 모방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한눈에 황소라고 알아볼 수 있도록 애정을 담아서 그린 것이지요.
김기창(1914-2001), 1960년대 초, 종이에 채색, 국립현대미술관 <소와 여인>은 김기창이 그린 반추상 회화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소도 여인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림 아래쪽을 유심히 보세요. 검은 선으로 소의 얼굴을 살짝 암시해 놓았습니다. 구긴 종이에 물감을 묻혀서 찍은 흔적이 쇠털 같기도 하고, 커다란 황토색 면은 황소의 듬직한 자태처럼 보이기도 하네요. 추상화된 그림에서 소와 여인을 보고 화가가 느낀 마음이 곧바로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곳에는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자연을 예찬한 작품들이 모여 있습니다. 발걸음을 늦추고 하나씩 천천히 감상해보세요.
윤제홍(1764-1845 이후), 조선 19세기 전반, 종이에 먹, 국립중앙박물관 단양 구담봉은 남한강 가에 솟아 있는 높이 338m의 바위입니다. 주위에 봉우리가 이어져 있으나 문인화가 윤제홍은 다섯 개의 봉우리로 구담봉을 표현했습니다. 화가가 화면 왼쪽에 “구담봉은 웅장하고 막힘이 없다. 신기한 절경 중에서도 특별하고 기이하다”라고 적은 것처럼 신선이 사는 곳처럼 신비롭게 묘사했습니다.
작가 모름, 조선 1583-1587년, 비단에 먹, 보물,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여섯 장이 이어진 《정사신이 참석한 계회도를 모은 병풍》이 펼쳐져 있습니다. 계모임 그림이라서 계회도라고 합니다. 요새 사람들 모임 참 좋아하지요. 조선시대에도 그랬습니다. 과거 합격 동기끼리도 모이고, 같은 관청 동료끼리도 모여서 술을 나누고 시 짓는 걸 참 좋아했습니다. 단체 사진 남기듯이 계회도를 주문해서 나눠 가지는 것도 유행이었죠. 계회도는 형식이 있습니다. 제일 위에 무슨무슨 계회도라고 제목을 달고, 가운데에 모임 장면을 그림에 담습니다. 아래에는 참석자 명단을 줄줄이 써 놓지요. 친목을 다지는 그림이라서 그렇습니다. 장면마다 산수풍경이 다른데요, 서로 다른 장소에서 모였기 때문입니다. 두 장면을 같이 보실까요? 가장 오른쪽의 첫 번째 그림은 <괴원장방계회도>입니다. 괴원은 외교 문서를 담당하는 승문원의 다른 이름입니다. 정사신의 첫 근무지였던 승문원 동료들이 한강변에 모였습니다. 사람은 누가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작게 그렸는데, 한강의 물과 강 건너 산은 시원하게 열려 있습니다. 한강은 한양에서 가깝고 경관이 아름다워서 계모임 장소로 사랑받았죠. 가장 왼쪽 그림은 <미원계회도>입니다. 미원은 사간원으로, 임금이 바른 정치를 할 수 있도록 보필하는 관청입니다. 사간원은 경복궁 동쪽,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앞에 있었습니다. 그림 속 우뚝 솟은 산이 바로 한양의 상징 북악산입니다. 도시 가까이에 자연이 펼쳐진 서울의 매력은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합니다. 누구나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게 보내는 시간을 꿈꿉니다. 마음 맞는 이들과 함께하면 그 즐거움은 갑절이 되겠죠. 자연 속에서 사람들과 어울렸던 추억이 조선시대 계회도에 남아있습니다.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는 현대인의 마음도 마찬가지겠지요.
장승업(1843-1897), 조선 19세기 후반, 비단에 엷은 색, 국립중앙박물관 자연은 인간에게 어머니 같은 공간이지만, 맨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자연에서 느끼는 긴장감은 많은 예술의 밑거름이 됩니다. 가장 오른쪽에 걸린 <온 세상을 웅혼하게 바라보다>는 조선 말기의 대가 장승업의 작품입니다. 불쑥 솟아오른 바위에서 매가 날개를 쫙 펼치고 있습니다. 눈매도 발톱도 정말 날카롭네요. 바위 그늘에는 토끼 한 마리가 매의 시선을 피해서 황급히 달아나고 있습니다.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팽팽합니다. 제왕의 위엄 앞에서 소인배는 움츠릴 뿐이라는 의미를 자연의 한 순간에 비유한 그림이지요.
박래현(1920-1976), 1956년, 종이에 수묵채색, 국립현대미술관 그 옆에 걸린 <피리>는 박래현이 1956년에 그린 그림입니다. 나무에 기대어 피리 부는 소년의 뒷모습이 한가롭기 그지없습니다. 화면을 과감하게 가로지르는 등나무 가지는 피리 소리에 맞추어 굼실굼실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된 행복한 순간입니다. 박래현은 이 그림을 그린 해에 막내딸을 낳았습니다. 아이를 기르고 집안일을 하면서도 시간과 맞서 싸워 이런 대작을 남긴 것이지요. 이야기를 알고 나니, 화가는 그림처럼 한가한 시간을 간절히 바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박노수(1927-2013), 1960년, 종이에 수묵채색, 국립현대미술관 자연의 신비와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 있습니다. 박노수가 1960년에 그린 <산정도>입니다. 거대한 바위산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오른쪽 하늘에 초승달이 떠올랐습니다. 달빛이 비친 듯, 바위에는 노란 빛이 어렸습니다. 어디선가 말 달려온 여인이 이 밤의 정적을 깨트립니다. 맨몸으로 푸른 말을 타고 채찍을 휘두르고 있네요. 커다란 바윗돌이 앞에 있어도 거리낌 없이 맹렬하게 앞으로, 앞으로 달려갑니다. 화면 가득한 청록색과 푸른색은 어딘지 모를 신비한 세계로 안내하는 것 같습니다. 제목의 ‘산정’은 산의 정령, 산도깨비를 뜻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천지의 기운을 인간 모습의 정령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자연의 끝없는 생명력이 한 폭의 대작에 담겼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난초 그림 세 점을 한 자리에 모았습니다. 탄력 있는 난초 잎은 한붓그리기로 표현하기 좋아서 일찍부터 먹그림으로 많이 그렸습니다. 난초는 산기슭에 자라는 풀꽃일 뿐입니다. 그러나 동아시아 사람들은 멀리까지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난초에 ‘인품이 고아한 선비’라는 의미를 붙여줬습니다. 가장 오른쪽 그림은 신명연의 작품입니다. 신명연은 화려한 꽃그림의 대가였는데, 이렇게 청초한 먹그림도 잘 그렸습니다. 물가 바위에 핀 난초를 그린 보기 드문 작품입니다. 가운데 그림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괴석과 난초>입니다. 이하응은 자신의 호가 ‘석파란’이라는 브랜드가 될 정도로 난초를 잘 그렸습니다. 그림 속 괴석과 난초 화분은 선비의 우아한 서재에 잘 어울릴 것 같네요. 이하응이 청나라 톈진에 납치되었다가 귀국한 뒤에 그린 노년의 작품입니다. 정치적 야심은 여전히 뜨거웠지만 그림은 젊은 시절보다 많이 부드러워졌습니다. 마지막 작품은 이하응에게 그림을 배운 김응원의 작품입니다. 먹이 아니라 물감으로 그려서 곱고 화사합니다. <영지와 난초로 상서로움을 드리다>라는 제목처럼 난초와 영지버섯을 함께 그렸습니다. 영지는 불로초라고도 했었지요. 그러니까 이 작품은 선비의 상징인 난초에 불로장생의 의미를 덧붙인 선물용 그림입니다. 상징과 의미도 시절 따라 변하는 것이겠지요.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것이어서 별스러운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울어대는 까치 소리에 “기쁜 소식을 전해주나 보다”라고 생각하는 건 인간의 사정일 뿐입니다. 난초의 의미도 붙이기 나름이겠지만, 그 아름다운 잎새를 보면 고운 사람이 자연스레 떠오릅니다.
조선 15세기 후반-16세기 전반, 국립중앙박물관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 왼쪽에 <분청사기 조화 모란무늬 항아리>가 있습니다. 귀가 네 개 달린 큼직한 항아리입니다. ‘조화’는 백토 바른 표면을 선으로 긁어 그리는 기법을 말합니다. 분청사기의 갈색 바탕흙과 정돈되지 않은 흰색 붓자국 위로 무늬를 긁어내기 때문에 여러 겹의 깊이감이 특징입니다. 과감하고 빠른 선으로 긁어낸 표현법인데, 현대적이라고들 많이 말합니다. 이 항아리는 표면이 정말 거칠거칠합니다. 날카로운 선으로 그린 꽃무늬는 사실 모란꽃인지 잘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백토를 휘둘러 바른 흔적과 자유로운 선에서, 꿈틀거리는 생명력이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강요배(1952년생), 2005년, 캔버스에 아크릴, 국립현대미술관 안쪽의 그림은 강요배의 <홍매>입니다. 화가의 심리를 표현한 추상화 같은 풍경화입니다. 캔버스에 겹겹이 쌓아올린 물감의 질감과 흐릿하고 짧은 선에서 매화나무 줄기가 어렴풋이 보입니다. 물감은 수수한 색을 써서 거칠거칠한 질감이 먼저 느껴집니다. 조금씩 찍은 붉은 물감에서 매화꽃 향기가 은은하게 풍기는 것 같습니다. 대상의 윤곽선이 허물어진 대신, 깊이감과 섬세한 맛이 함께 살아났습니다. <홍매>의 반추상 표현과 <분청사기 조화 모란무늬 항아리>는 묘하게 닮았습니다. 현대 미술과 전통 공예의 만남, 낯설지만 서로 통하는 예술의 세계입니다.
박대성(1945년생), 1996년, 종이에 수묵채색, 국립현대미술관 겨울은 고요한 계절입니다. 소복하게 쌓인 눈 속에 소리마저 묻혀버리면 새하얀 별세상이 펼쳐집니다. 박대성의 <불국설경>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눈 덮인 소나무들만 저마다 가지를 늘어뜨리며 겨울의 고요함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1995년 가을, 뉴욕에서 귀국한 박대성은 경주로 내려가 1년간 불국사 손님방에 머물며 불국사 연작을 선보였습니다. 마침 그해 겨울 경주에는 7년 만에 눈이 내렸고, 박대성은 불국사의 설경을 고즈넉한 풍경으로 그렸습니다. 그림 왼쪽 윗부분에는 불국사에서 받은 감동을 한글 고체古體로 적어놓았습니다. 전시기간: 2022. 7. 1. - 8. 28.
작가 모름, 조선 19세기, 비단에 색, 국립중앙박물관 자연은 늘 변화하지만 짧은 시간을 살다 가는 인간의 눈에는 영원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 병풍은 바닷가 절벽에서 자라난 복숭아와 학 무리를 그린 것으로 십장생도에서 파생된 장식 그림입니다. 반도蟠桃는 삼천 년에 한번 열매를 맺으며, 한 알을 먹으면 수명이 삼천 년 늘어난다고 하는 복숭아입니다. 해가 떠올라 불그스름하게 물든 대기 속에 신선의 세계처럼 환상적인 경치가 펼쳐져 있습니다. 전시기간: 2022. 7. 1. - 8. 28.
김흥수(1919-2014), 1970년대,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붉은색과 녹색 계통 물감이 번지고 서로 스며들면서 생명력을 표출하는 작품입니다. 김흥수는 추상과 구상을 오가며 실험적인 작품을 남긴 화가입니다. 구상과 비구상, 한국화와 서양화, 음과 양 등 양립하기 어려운 개념들이 함께 존재하는 작업을 했는데, 이 <작품>은 두 가지 개념이 양립하는 시기 전에 제작한 작품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자연을 활용하는 지혜는 문명의 조건입니다. 인간은 변화무쌍한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연을 탐구하고 인간에게 유리하게 활용했습니다. 여기 토기부터 도기, 청자, 자기로 이어진 흙 그릇의 수천 년 역사가 한눈에 펼쳐집니다. 윗줄 제일 왼쪽에는 반질반질하게 문질러 만든 <붉은 간토기 항아리>가 있습니다. 토기 만들기는 최초의 화학 기술이자 혁신이었습니다. 흙과 물로 빚은 그릇을 불에 구우면 단단해진다는 것을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오랜 경험으로 터득했습니다. 처음에는 모닥불을 피웠지만, 나중엔 경사면에 가마를 지어서 물이 스며들지 않는 단단한 도기를 구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끓이는 조리법도, 물기 있는 음식물 보관도 훨씬 편해졌지요. 생활의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윗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 그릇인 <긴 목 항아리>를 보세요. 가마 속에 날리는 잿가루가 우연히 그릇 표면에 녹아내리면 반짝이는 막이 생깁니다. 인간은 이 현상을 연구해서 유약을 만들어냈습니다. 재료 배합과 불 때기를 섬세하게 조율하면 옥처럼 고운 그릇을 만들 수 있습니다. 청자의 탄생입니다. 더 아름답고 더 단단한 그릇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은 마침내 자기의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자기 흙은 고령토에 장석과 석영을 섞어 1300도의 고온에도 견디도록 특별히 만든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백자 만들기 좋은 흙을 찾기 위해 국가가 나서서 전국을 조사할 정도로 힘을 기울였지요. 도자기 만들기는 과거의 첨단 기술이자 예술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첨단 공학의 뿌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최종태(1932년생), 1992년, 청동, 국립현대미술관 인간은 모르는 것이 참 많습니다. 자연은 경이로우면서도 두렵고, 죽음은 도무지 알 수 없는 끝이지요. 인간은 오래전부터 삶의 본질을 사유해 왔습니다. 최종태가 만든 <생각하는 여인>은 반가사유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왜 모든 것은 병들고 죽을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유한한 생의 의미를 고뇌한 석가모니의 말씀은 글로 남아 지혜의 보물이 되었습니다.
고려 11세기, 종이에 목판 인쇄, 국보, 국립중앙박물관 고려 초조대장경의 일부인 『현양성교론』이 펼쳐져 있습니다. 석가모니는 인도 사람이어서 최초의 경전은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삼장법사로 유명한 당나라 현장 같은 승려들이 그 경전을 한문으로 옮겼습니다. 이렇게 축적된 한문 경전은 양이 어마어마합니다. 고려에서는 11세기에 불교 경전 전체를 집대성해서 초조대장경을 완성했습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보다 200년 넘게 오래된 대장경이죠. 거란에 맞서 싸운 전쟁에서 목판은 불타버렸지만, 『현양성교론』은 초조대장경 판본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조선 1447-1449년, 종이에 활자 인쇄, 국립중앙박물관 오른쪽으로 이동하시면 석가모니의 생애를 우리말로 옮긴 『석보상절』을 보실 수 있습니다. 경이로운 부처님 말씀을 더 널리 전하려면 한글만한 글자가 없습니다. 세종대왕은 세상을 먼저 떠난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려고 불교 서적을 펴내기로 했습니다. 둘째아들 수양대군이 명을 받들어 『석보상절』을 지었지요. 금속활자인 갑인자로 찍은 초간본이라 더욱 귀합니다. 한자에 음을 단 한글과 우리말 부분의 한글에는 서로 다른 활자를 사용했습니다. 글자의 크기와 서체를 체계적으로 나누어 놓아서 눈에 술술 들어오게 편집했습니다. 수집가가 그득그득 모은 옛 책들은 이처럼 지혜의 보물창고였습니다.
조선 17세기, 나무와 금속, 국립중앙박물관 대웅전이나 지장전 안에는 <업경대>가 있었습니다. 『불설예수시왕생칠경』 등 경전에는 죽은 이가 염라대왕의 심판을 받을 때, 생전의 죄를 모두 비추는 거울인 업경 앞에 선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업경대는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권선징악의 메시지를 전하는 도구입니다.
진재해, 장득만 등 8인, 조선 18세기 전반, 종이에 색,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유난히 자녀 교육에 힘을 쏟았습니다. 왕실 어린이들은 어릴 때부터 『천자문』은 기본이고 어려운 유교 경서까지 읽어야 했습니다. 아직 글자를 모르는 어린 아이를 위한 교재도 있습니다. 요즘 아이들과 똑같이 그림책으로 공부를 시작했지요. 그림책인 《고사인물화보첩》 4권에 모두 65장의 그림이 실려 있습니다. 본받을만한 옛 성인과 역사적인 사건을 한 장씩 그려서 교훈을 배울 수 있게 엮은 것입니다. 필선과 채색이 꼼꼼해서 원색 화보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림 아래에는 화가의 이름도 작게 써 놓았습니다. 장득만, 진재해 등등 여덟 명이 나오는데, 모두 18세기 초반에 도화서에서 근무한 화원들입니다. 여러 왕실 화가들이 힘을 합쳐 그렸으니 왕실 어린이를 위한 귀한 그림책이었겠지요. 정조 임금은 이 그림책 맨 뒷장에 자기 도장을 찍어놓았습니다.
영조(재위 1724-1776), 권적(1675-1755), 김상성(1703-1755) 등 14인, 조선 1741년, 그림: 종이에 색, 글씨: 종이에 먹, 국립중앙박물관 교육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아이를 가만히 내버려두자니 불안하고, 너무 간섭하자니 잔소리가 되니까요. 《경현당 갱재첩》에서 영조 임금의 아들 교육 이야기를 살펴보세요. 사도세자는 두 살 때부터 『천자문』을 읽었습니다. 대단한 조기교육이었네요. 영조는 경현당에 세자와 신하들을 불러서 공부 성과를 들었습니다. 그림을 보면 빈자리로 나타낸 왕과 세자 앞에서 열세 명의 신하들이 임금이 내린 술상을 받고 있습니다. 영조는 세자가 총명하다는 신하들의 칭찬을 들으면서도 아들이 영 미덥지 못했나 봅니다. “살이 찌고 밖에서 노느라고 피부가 탔다”고 핀잔을 준 일이 이 서화첩에 기록되어있습니다. 물론 영조는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사도세자를 다그쳤겠지만, 지나치게 강압적인 교육은 훗날 벌어지는 비극의 씨앗이 되고 말았습니다.
김준근(19세기 말-20세기 초), 조선 19세기 말-20세기 초, 비단에 색, 국립중앙박물관 놀이에 몰두한 인간 군상을 생생하게 표현한 그림입니다. 남자들이 기생과 어울려 골패 노름을 하고 있습니다. 띠를 머리에 동여매고 색안경을 낀 모습이 흥미롭습니다. 이 그림은 김준근이 개항장에서 외국인에게 팔기 위해 그린 그림 중 하나로, 19세기 말 조선의 풍속을 알 수 있어 가치가 높습니다.
이인성(1912-1950), 1934년, 종이에 수채, 대구미술관 20세기 전반 인간을 향한 시선과 표현이 다양해지면서 근대 지식과 문물을 체현한 신여성이 그림에 등장했습니다. 화가 이인성이 연인이자 훗날 아내가 되는 김옥순을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녀는 대구 유지의 딸로 당시 일본 도쿄에서 의상 디자인을 공부하고 있던 신여성이었습니다.
이인성(1912-1950), 1940년대, 나무패널에 유채, 대구미술관 수집품의 이야기를 따라 온 전시도 이제 막바지네요. 인간은 알 수 없는 것을 무서워합니다. 그래서 <난초> 그림처럼 자연물과 생명체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담아 이해하려고 했죠. 자연을 활용해서 흙을 도자기로 바꾼 지혜 덕분에 연약한 몸으로도 문명을 이룩해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내일은 알 수 없고,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인성이 그린 <인물>은 지혜로도 어쩔 수 없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박래현(1920-1976), 1959년, 종이에 수묵채색, 국립현대미술관 불안한 현실과 이를 포용하듯 묵묵히 받아들이는 여인의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여인의 다리 사이에 웅크리고 있는 검은 고양이, 여인 뒤쪽의 검은 그림자, 날카로운 가시와 나뭇가지, 그리고 거꾸로 매달린 새는 여인 주위에 존재하는 불안을 상징합니다. 여러 불안 요소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여인은 묵상하고 있습니다.
이응노(1904-1989), 1985년, 캔버스, 종이에 수묵, 국립현대미술관 이응노가 그린 <군상>은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화가 나름의 대답처럼 보입니다. 외로움을 견디기 어려운 인간은 작게는 가족, 크게는 국가라는 울타리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또 누구나 독립된 주체로 살고 싶어 합니다. 근원적인 모순이지요. <군상>에서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얽혀 거대한 에너지를 분출합니다. 비슷해 보이지만 저마다 몸짓도 모습도 똑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따로, 그러나 함께하는 그림이라서 이처럼 용솟음치는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는 것이겠지요.
김환기(1913-1974), 1973년,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인간은 상상의 힘을 발휘해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김환기의 <산울림>은 예술가의 상상력이 무르익었을 때 한 폭의 그림에 우주를 담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화가는 캔버스에 아교물을 바르고 그 위에 하나씩 하나씩 점을 찍고 테두리를 두르는 작업을 반복했습니다. 작업에 몰두하다보면 어느새 이 큰 캔버스가 점으로 가득 찹니다.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면, 별과 달과 우주가 소용돌이치는 파동이 캔버스에 번져나갑니다. 문화유산과 예술은 무한한 세계로 들어가는 초대장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어느 수집가의 초대”는 어떠셨나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셨기를 소망합니다.
나비 群蝶圖, 남계우(1811-1890), 조선 19세기, 종이에 색, 국립중앙박물관 봄이 시작되면 나비가 찾아옵니다. 나비 그림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좋은 의미를 지녔습니다. 나비 ‘접蝶’과 노인 ‘질耋’의 중국어 발음이 모두 ‘디에(dié)’여서 나비 그림으로 장수를 축원합니다. 19세기 문인화가 남계우는 나비를 관찰해서 종류와 암수를 알아볼 수 있도록 세밀하게 그렸습니다. 전시기간: 2022. 7. 29. - 8. 28.
나비 胡蝶圖, 이경승(1862-1927), 1919년, 비단에 수묵채색, 국립현대미술관 봄의 정경을 상상해보면 흐드러진 꽃과 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나비가 떠오릅니다. 이 그림에는 서로 다른 계절의 꽃들이 한꺼번에 피어난 기이한 풍경 속에 각양각색의 나비가 떠다닙니다. 이경승은 남계우의 전통을 이어 나비 그림을 많이 남겼습니다. 나라 잃은 울분이 만세의 함성으로 터져 나왔던 1919년의 봄에도, 나비들은 여전히 산하를 날아 다녔습니다. 전시기간: 2022. 7. 29. - 8.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