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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원왕후부묘도감의궤(仁元王后祔廟都監儀軌) 상세보기 이전으로 설명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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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9년(영조 35) 5월 6일 거행된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金氏, 1687~1757) 신주 부묘 과정을 기록한 『인원왕후부묘도감의궤(仁元王后祔廟都監儀軌)』에 수록된 반차도이다. 숙종(肅宗)의 둘째 계비인 인원왕후는 1757년(영조 33) 3월 26일 창덕궁 영모당(永慕堂)에서 승하한 후 7월 11일 발인하여 12일 고양의 명릉(明陵) 오른쪽 언덕에 안장되었고, 왕후의 우주는 같은 날 창경궁 문정전(文政殿)에 마련된 혼전에 모셔졌다. 혼전의 영좌에 봉안되어 있던 우주는 첫 번째 기일에 연제를 지내면서 밤나무로 만든 연주(練主)에 존호와 휘호, 시호를 합쳐 ‘혜순자경헌열광선현익강성정덕수창영복융화정의장목인원왕후(惠順慈敬獻烈光宣顯翼康聖貞德壽昌永福隆化定懿章穆仁元王后)’라고 쓴 정식 신주가 되었다. 왕후의 사후 휘호는 ‘정의장목(定懿章穆)’, 시호는 ‘인원(仁元)’이었고 앞부분은 생전에 10번에 걸쳐 받은 존호였다. 3년 상기가 끝나고 1759년 5월 5일 영조(英祖)와 세자가 신주를 모시고 종묘에 나아가 이튿날 숙종의 신실(神室)에 봉안하였다.
도감에서는 1차 예행연습[初度習儀] 하루 전인 4월 24일 전례에 따라 반차도를 그려서 영조에게 올렸다. 어람용 1건을 올리는 것이 관례였지만 이때에는 3건의 어람반차도를 제작하여 세자와 세손에게도 올렸다. 그런데 5월 2일 3차 예행연습 후 영조가 책은 요여에, 보는 채여에 따로 모시라고 전교함에 따라 이틀 뒤 반차도를 고쳐 그려서 다시 올렸다. 당시에는 발인 때처럼 책과 보를 하나의 요여에 모시기로 하고 반차도가 제작되었는데 영조는 나라의 기강을 세운다는 차원에서 도감 당상을 파직하고 부묘 의례의 절차대로 책과 보를 따로 모시도록 한 것이다.
이 반차도는 부묘의식 후 제작된 7건의 의궤 중 어람용 의궤에 수록된 것으로, 인원왕후의 신주를 문정전에서 종묘로 봉안해 가는 행렬을 순서대로 그렸다. 행렬은 소가(小駕)로 인도하고 전사대(前射隊)가 선두에서 시위하는 가운데 왕후의 의장, 책·보류를 모신 요여와 채여, 전부고취, 신주를 모신 신련(神輦)이 나아가며, 도감 관원들이 수가하고 후사대가 서는 순서로 편성되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수가 행렬은 반차도로 그려지지 않았다. 왕실 최고 어른이자 영조의 후원자로서 생전에 10번에 걸쳐서 받은 존호의 책과 보를 요여와 채여 20부에 각각 모심에 따라 예모를 갖춘 긴 신주 행렬이 편성되었다.
이 반차도는 도장[印刻]을 활용한 분상용 의궤 반차도와는 달리 인물과 가마, 말들을 일일이 그려서 완성하였다. 가는 붓으로 인물의 이목구비와 옷, 관모, 들고 있는 물건들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채색을 공들여 하였다. 상들의 균형이 잘 잡히고 크기도 고를 뿐더러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어 숙련된 솜씨를 느낄 수 있다. 한편 가마는 나무판에 새겨서 찍고 윤곽선과 문양 및 채색을 더하여 완성하였는데, 입체형 가마 묘사와 가마꾼 배치에서 실제 행렬을 묘사한 듯한 느낌을 준다. 또한 의식에 참여한 관원 및 군관들이 품계에 맞게 한두 명씩 거느리던 구종배들이 묘사되지 않고 대기인 백택기를 들던 의장군이 3명에서 1명으로 바뀌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주목할 만한 반차도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송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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