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천 전곡리 유적은 1978년에 발견된 뒤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서구나 아프리카의 전형적인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출토되는 이른 시기 구석기 유적으로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후 전곡리 유적은 서양의 주먹도끼 문화권과 동아시아의 찍개 문화권으로 구분된다는 기존의 모비우스 학설을 폐기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하였고 동아시아 이른 시기 구석기 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전곡리 주먹도끼는 어떻게 발견되었고, 서양의 아슐리안 주먹도끼와는 어떻게 다르며, 구석기 문화에 있어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전곡리 유적의 주먹도끼는 언제, 어떻게 발견되었을까?
- 한 미군 병사와 전곡리 유적의 인연
그렉 보웬(Greg L. Bowen)은 미국 캘리포니아 빅터 밸리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하다가 1974년 미군에 입대하면서 한국의 동두천에서 주한 미공군 하사관으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1978년 한탄강 유원지에 한국인 애인과 함께 산책을 갔다가 토기편을 발견하고 그 주위를 조사하면서 주먹도끼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이 주먹도끼가 동아시아 구석기 고고학에 있어 기념비적인 발견이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아슐리안 형식의 주먹도끼를 지표 채집한 그는 동아시아에서 주먹도끼가 가지는 중요성을 직감하고 이후 다시 현장을 찾아 정확한 발견지점을 표기하고 간략한 보고문도 작성하였습니다. 한국에서 전기 구석기가 발견된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는 프랑스의 구석기 대가인 프랑수아 보르드(Francois Bordes) 교수에게 편지로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보르드 교수의 소개로 서울대학교 고고학과 김원룡 교수를 안내받은 그는 여주 흔암리 발굴 현장에서 김원룡 교수를 직접 만나 전곡리 주먹도끼 발견소식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그의 학문적인 집념이 없었다면 동아시아의 구석기 문화는 지금까지도 모비우스의 찍개 문화권의 개념 속에서 평가받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1978년에 제대한 뒤 미국으로 돌아가 애리조나 주립대학교에서 고고학을 전공하고 1981년에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1988년부터 애리조나주 나바호 인디언보호구역에서 발굴책임자로 일했습니다. 이후 2005년 경기도 연천군의 초청으로 한국인 아내와 함께 28년만에 전곡리 유적 현장을 다시 찾은 그는 주먹도끼를 발견한 뒤 기뻐하던 당시 상황을 직접 설명해 주었습니다. 한국은 자기 인생에서 가장 큰 두 가지 선물을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전곡리 구석기 유적과 자신의 아내라고 말하며 한국과 전곡리 유적에 대한 애착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2009년 2월에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전곡리 구석기인의 예술적 미감
-전곡리 유적에서 가장 잘 만든 주먹도끼
이 주먹도끼는 2007년 연천 전곡리 유적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체적으로 황갈색을 띠며 석재가 고운 규암으로 만들었습니다. 강자갈을 이용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대형의 박편을 이용하여 만들었습니다. 전체적인 형태는 반달형입니다. 대형 박편의 가장자리를 등면과 배면 양쪽에서 간단히 몇 차례의 타격을 가하여 날을 만들었는데, 상당히 시원시원하게 날이 뻗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두께는 8.2cm로 상당히 두터운 편으로 원석인 박편의 원래 형태에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전체 길이는 23.6cm로 현재까지 전곡리에서 확인된 주먹도끼 가운데 가장 큽니다. 주먹도끼의 날이 시원스럽게 뻗어 있는 모습과 전체적인 형태의 아름다움을 통해 전곡리 구석기인의 뛰어난 예술적 미감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서구나 아프리카의 주먹도끼와 전곡리 주먹도끼는 어떻게 다를까?
주먹도끼는 형태적으로 끝이 뾰족하거나 전체적으로 둥근 타원형의 석기를 말하며, 기능적으로는 주먹에 쥐고 사용했던 석기를 말합니다.
서양의 주먹도끼는 아슐리안(Acheulian)으로 불리는데, 프랑스 북서부 솜므강 강변에 위치한 생 아슐(St. Acheul)에서 다량의 석기가 확인되면서 붙여진 명칭입니다. 유럽과 아프리카에서는 개별 도구를 나타내는 주먹도끼라는 용어보다는 전체적인 석기군의 특성을 아우르는 아슐리안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서양에서 부르는 고전적인 아슐리안 주먹도끼는 아몬드나 타원의 평면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끝이 뾰족하며, 단면은 양쪽이 볼록한 렌즈 모양입니다. 석기 주변부를 따라서 날카로운 날이 있고, 양면 전체를 떼어내어 만듭니다.
반면에 전곡리를 비롯하여 국내에서 확인되는 주먹도끼의 경우에는 한쪽 면만을 가공한 경우가 많으며 석기 표면에는 손잡이 부분을 중심으로 자연면이 많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측면 날은 직선을 이루지 못하고 꼬인 형태를 보이며, 석기의 중심축도 다소 뒤틀려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단면은 서구와 같은 볼록한 렌즈 모양이 아니고, 석기 재료의 형태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전곡리 구석기인들은 주먹도끼로 어떤 일을 하였을까?
구미의 연구 성과를 살펴보면 아슐리안 주먹도끼는 아몬드나 타원의 평면 형태에 전체적으로 돌아가면서 날카로운 날을 가지고 있어 주로 동물의 사체를 해체하거나 가공하는 데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곡리를 포함한 동아시아의 주먹도끼는 다소 투박한 형태적 특성으로 인해 유럽이나 아프리카에서와 같이 한 가지 기능만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기능을 복합적으로 수행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주먹도끼만 가지고도 자르는 작업, 긁는 작업, 찍는 작업 등 여러 작업을 할 수 있습니다. 주먹도끼는 사냥, 도살, 가죽이나 나무, 뼈 가공 등을 위한 작업에 쓰인 것으로 보입니다.
전곡리를 포함한 동아시아의의 구석기문화 전통
- 찍개 문화권인가?, 주먹도끼 문화권인가?
세계의 구석기문화 속에서 동아시아의 구석기 문화 전통은 어떠한 특징을 지니는 것일까요? 이에 대한 대답으로 1940년대 초반 모비우스(Hallam L. Movius, Jr)가 세계의 이른 시기 석기문화 전통을 두 가지로 분류하였습니다. 서양은 주먹도끼 문화권(Hand Axe Culture)으로, 남부아시아와 동아시아는 찍개 문화권(Chopper-Chopping Tool Culture)으로 구분하였습니다. 그는 북서부 인도, 버마, 북동부 중국, 자바 등지에서의 조사를 통하여 이 지역의 소안(Soan), 아니아티안(Anayathian), 주코우티안(Choukotien), 파지타니안(Patjitanian) 문화는 찍개문화권으로 특징지을 수 있으며 주먹도끼가 전혀 없거나 몇 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주먹도끼가 발견된다 하더라도 기술적으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유럽의 주먹도끼 문화권과는 연관시키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찍개 문화는 서양에서는 아슐리안 문화로 발전해 나간 반면에 동아시아에서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고 주장하고, 이러한 석기문화권의 차이는 고인류의 종류가 다른 데서 오는 것이라는 인종적인 언급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비우스가 연구를 진행한 1940년대의 상황은 정확한 층위적 상황을 가진 조사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연구의 근간이 되는 연대적인 문제도 논리적으로 불합리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그의 이분법적인 구석기 문화전통의 구분은 전곡리 유적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주먹도끼를 포함한 대형석기군이 확인되는 유적의 발견 사례가 증가하면서 이제는 폐기되어야 할 시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